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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파자소암(婆子燒庵)

노파 2011. 6. 8. 07:47

 

 

파자소암(婆子燒庵)

장지원

 

 

노파가 암자를 불태우다.

불가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암자를 지어 한 선승을 20년 동안 뒷바라지를 하던 공양주 노파가 있었다. 하루는 시봉을 하던 자기 딸을 시켜 스님 무릎에 올라가 진한 교태를 부리라고 했다.

 

딸아이 : “스님 이럴 때 기분이 어떠십니까?”

스님 : “고목이 찬 바위에 기대니 삼동설한에 따뜻한 기운이 없구나.” (古木琦寒岩(고목기한암) 三冬無暖氣(삼동무난기)

딸아이 : “그러시다면 스님은 저 같은 소녀가 정을 주어도 안 받으시겠네요”

스님 : 받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 정이라는 걸 느끼시지를 못하겠는 데“

 

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노파는 “저런 속한 이에 20년 동안 밥을 지어주고 빨래해주다니” 하며 탄식한다. 주저하지 않고 암자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러자 승객은 노파에게 보답은커녕 배신하고 떠나가 버린다.

 

노파를 대신한 딸의 견성(見性) 검증의 2차례다 실패를 한다.

첫 번째 패착

고목기한암(枯木琦寒岩)이라는 대답은 ‘그의 선행은 생명이 없는 고목이요 불 꺼진 나무의 재 같다.(고목사회 枯木死灰)는 것이다.’

교태라는 창살에 갇힌 원숭이처럼 수행이라는 창살에 막힌 채 자연스럽고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낱 부처를 흉내 내는 가부좌의 모방이며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패착 : ‘여자의 정을 느끼지 못한다.’라는 대답이다.

이 말은 전적으로 노파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은망덕이다.

물론 노파의 호의는 세속적인 통정을 통한 육 보신가 아니다. 너그러운 자비심과 법열로 딸아이의 노고를 칭찬해주고, 손이라도 한 번 꼭 잡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노파의 호의는 일면 테스트의 성격이 있었다.

선객은 자기 수행을 자가당착적인 선에 머문 채 밖을 향해 나갈 동선에는 캄캄했다. 이래서 급기야 노파는 암자에 불을 질러 선객을 산 밖의 세속 사회로 내몰았다고 한다.

 

교훈은? 수행과 계행이 쇠창살 안에 갇혀 있는 죽은 선객을 대승 보살행을 펼치는 현실 참여의 동선으로 끌어올 리는 것이다.

 

성현 혹자는 바쁘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죽은 나무가 걸어간다.’ 하였다. ‘상여 뒤를 울며 따르는 무리를 보고 죽은 자를 죽은 자들이 따르고 있다’라고 했다. 어찌 속인들이 이 말의 의미를 알겠는가. 선객의 선행이 죽음에 비유된 불 꺼진 나무의 재다. 생명이 없는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엄한 질책이다. 노파의 은혜를 유추해 내지 못하는 배은망덕이다. 이는 루스벨이 하늘에서 쫓겨나듯, 선객은 20년이나 공들여온 절간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중이 보기 싫으면 절간을 떠난다.’는 말과는 배치되는 현상이 같은 곳에서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자의 노파는 절간을 지은 주인이고 후자는 스님들 간이나 스님과 신도들 사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없고 선을 베풀 줄 모르면서 신앙에 전진하는 돌중과 같은 사람들이 많다. 지금도 우리 사회 요소요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때 노파의 심정으로 불을 질러서라도 그 가면의 탈을 벗겨 추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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