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의문학공간

https://tank153.tistory.com/

노파의문학공간

소설 7

동행(同行) /Going Together

동행(同行) /Going Together 단편소설/장지원 오늘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선영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급히 강의실을 빠져나간다. 오늘따라 말쑥한 차림에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듯 평상시보다는 멋도 내고 시간을 주름잡듯 서두르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선영이 현관을 막 나서려고 할 때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학생들이 현관에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조밀하게 모여들었다. 선영이 그 틈에서 시계를 드려다 보고 있었다. 태민이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일분 이분이 선영에겐 중요한 시간이다. 여름 날씨조차 그에게 도움이 안 된다니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혼잣말로 “큰일 났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 강의를 빼먹을걸” 선영의 얼굴에 수심이 소나기를 퍼붓..

소설 2011.06.01

동네 라디오

동네 라디오 老波 장지원 초등학교 3학년인 원이는 학교에 갔다 집엘 온다. 겨울 날씨가 땅 거죽을 꾸둑꾸둑 얼리고 있는 오후 한나절 햇살은 여전히 따스하다. 동네 사람들이 사랑방에 한 방 가득 모여 있었다. 작은 방에다 책보를 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한구석에는 큰 물독이 자리하고 있다. 또 한쪽에는 갈비가 쌓여 있고, 장작도 몇 아름은 되어 보인다. 늘 어머니는 내게 땔감을 부엌에다 비축하기를 이야기하셨다. 어머니의 일을 덜어드리기 위해, 이 같은 부탁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운 일이었다. 나무를 나르면서도 가지런히 쌓는 것이 내 욕심이었고, 그런 나 자신이 누군가의 칭찬을 듣기를 기대했지만, 번번이 모두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다. 부엌엔 온기가 없이 상당히 추웠다. 점심을 먹고 그냥 덮어..

소설 2011.05.30

토사곽란(吐瀉癨亂)/Acute Gastroenteritis

토사곽란(吐瀉癨亂)/Acute Gastroenteritis 단편소설/장지원 오월 셋째 주 늦은 봄 날씨는 온몸의 땀구멍을 서서히 열어 놓는다. 후덥지근한 교실 안은 역겨운 냄새로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 같다. 지원은 갑자기 식은땀을 흘린다. 3학년 1반 5교시 자연 시간은 지옥의 문을 넘어온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 선생님이 흐트러진 나의 표정을 보시더니 “너 왜 그래.” 하신다. 어금니를 물고 배를 움켜잡고 안간힘을 써본다. 그럴수록 속은 더 뒤틀리고 입에서는 이상한 액체가 고였다.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도시락도 쌀 형편도 못 되어 오늘도 점심을 건너뛰었다. 그런데 배 안에서 무슨 조화인지 천둥소리에 지진까지 일어난다. 점심시간이다. 친구들은 도시락을 맛나게 먹는다. 나는 입에 고이는 침을 ..

소설 2011.05.27

양근(楊根) 나루

양근(楊根) 나루 장지원 갯버들이 푸른 잎 사이에서 솜털을 날린다. 하얀 꽃가루를 뭉실뭉실 토하여 낸다. 산책 나온 사람들은 비위라도 상한 듯 모두가 형형색색의 마스크를 하고 걷는다. 戊子年 봄은 유난히도 꽃가루가 많이 나는 것 같다. 시민들의 생활에 작은 해라도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하다. 양근(楊根) 이라는 지명은 말 그대로 버드나무의 뿌리에서 유래된 말이다. 봄 한 철 날리는 꽃가루 정도는 깊이 감수해야 할 듯싶다. 요즘은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무관한 생각마저 들어 그들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다. 나도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봄 한 철 지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역사적인 명소 양근 나루를 찾는 내가 예의나 품의를 갖추지 못하고, 하얀 마스크를 착용하고 이곳을 찾았다. 어느 사..

소설 2011.05.12

동창회

동창회 소설/장지원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자랑스러운 부석초등학교 총동창회 겸 동문 체육대회가 모교 교정에서 열린다. 나는 올해면 두 번째로 참석하게 되는데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고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지는데 어릴 때 명절이 돌아오면 부모님이 새 옷을 사주시는데 한 해에 한두 번 얻어 입은 옷이라 기다림이란 어떤 경우라도 참고 기다려야 하는 어린 마음을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옷을 사주시며 장터 노점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기고 새 옷이 잘 맞는지 옷, 맵시를 살피시던 그땐 주위 시선이란 살필 필요가 없었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쪽팔린다고 말했겠다고 짐작이 된다. 신이 나고 좋기만 했던 그 시절 이제 그 장터가 있고 작은 후산 자락에 내가 공부하고 졸업한 부석초등학교가 있으..

소설 2011.05.10

단편소설 단편소설 등단작 / 장지원/2010년7월 문예사조 소설 신인상 길 장지원 때는 1950년 가을 돌담 곁에 서 있는 대추나무에 열린 열매가 소담스럽게 가을 햇살을 받으며 붉게 익어가고 있을 때 고즈넉한 산골 마을에 정적을 깨뜨리는 총성이 가을걷이에 바쁜 시골 아낙의 가슴을 훌고 지나간다. 이놈의 세상을 한탄하는 시골 아낙네의 한숨이 짓는 해를 따라 서산으로 넘어가고 소백산 골짜기에도 어둠이 몸서리치는 전쟁의 공포와 함께 짙게 갈려 내려온다. 다른 두 길 6.25 사변이 발발한 지 벌써 넉 달이 차오른다. 경상북도 최북단 태백산과 소백산이 만나는 조용하던 산골 마을 남대리 전쟁 통이라지만 여느 때와 별반 다른 게 없이 일상은 산속에 푹 빠져 흙냄새 조차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 마을 이장..

소설 2011.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