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이황李滉」
장지원
「퇴계 이황」(1501-1570)은「연산군」 7년에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중종」,「인종」, 「명종」, 선조 대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자로 존경받은 인물이다. 그의 학문(學文)과 사상(思想)의 경지는 높이 평가 받고 있다. 「퇴계」는 27세에 향시에, 34세에는 대과에 급제하고도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았다. 성균관을 중심으로 후진 양성에 전념하게 된다. 52세까지 세 차례나 관료 생활을 등지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초야에 묻혀 야인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조선의 정치는 종친과 외척들의 권력 투쟁이 극심하던 때라 그의 젊은 시기를 조심스레 과도기를 준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45세(1545년 인종 1년)에 을묘사화(조광조 복관)로 인해 파직된다.
어려운 시기도 있었으나 1546년 (명종 1년) 교서관 교리에 복직 제수 된다. 내직에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여 양진암을 짖는다. 학문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던 중 「명종」 4년(1549년) 외직인 풍기 군수로 제수 된다. 백운동 서원을 소수 서원(지금의 영주 순흥)으로 개칭할 것을 상소한다. 국왕의 사액을 받는 최초의 서원으로 기틀을 마련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해 9월 그는 3차례에 걸쳐 사임서를 제출한다.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또한 그는 평생 공직자로서 79번이나 관직을 사퇴하여 자리나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다. 선비로서의 청빈한 생활을 하였으며 본인이 세운 서원이나 서당은 모두 후학 양성을 위해 제자들에게 위탁한다. 당대의 교육자, 사상가, 공직자로서 모본은 후대에 이르러 우리는「퇴계 이황」을 좋아하게 하는 것 같다.
「퇴계 이황」의 죽음의 자리에서 그의 인품을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가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보낸다. 그 소식을 듣고 조목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병간호하였다. 12월3일 자제(子弟)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책들을 돌려보내게 한다. 12월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遺書)를 쓰게 한다.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
2) 비석(碑石)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이황의호)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 한다.
12월7일 제자 「이덕흥」에게 서적을 맡게 하고는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퇴계 이황」 선생이 타계(他界)한 지 432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한민족(韓民族)의 정서 속에는 그의 얼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노자』는 “욕심이 많은 것보다 죄악이 큰 것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해악이 큰 것이 없으며, 얻겠다는 탐욕보다 죄의 근심이 큰 것은 없다, 만족할 줄 알아 그치는 사람만이 영원히 만족한다.”. “성인은 사사로이 자신의 것을 쌓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갖게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많게 된다.”라고 말했다. “죽어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영원토록 사는 것이다”. 라고 했다. 「퇴계」 선생의 사상이나 철학은, 자연의 이치와도 같다. 성서(聖書)의 진리(眞理)와도 일치 한데가 많다. 물(水)은 진리(眞理)의 나룻배를 대해(大海)로 인도한다. 진리(眞理)의 배에 탄 자연인(自然人)은 누구인가. 그는 우리가 존경하는 「퇴계 이황」 선생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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