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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난고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와서

노파 2011. 5. 11. 08:22

난고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와서

장지원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炳淵)이고,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해서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라고 흔히 부른다. 선생은 안동 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宣平(선평)의 후예로 조부는 선천 부사 益淳(익순)이고, 父 安根(안근)과 母 함평 李 氏 사이의 3남 중 2남이다.

순조 7년(1807년) 3월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출생하였고, 名은 炳淵 (병연) 子는 性深(성심), 號(호)는 蘭皐(난고)이고, 笠(립)은 俗稱(속칭)이다.

그를 일컬어 방랑시인, 유랑시인, 해학시인, 풍자시인 등으로 불리고 있다.

 

휴가를 내놓고 꼬박 이틀을 이번 여행을 위하여 자료를 찾으며 탐방 계획을 세웠다.

2004년 8월 3일 화요일 드디어 예정된 시간에 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짐을 챙겨 가족들과 함께 애마에 올랐다.

 

춘천에서 08시 30분에 중앙고속도로에 올랐다. 09시 50분에 신림에서 내려 옛날 김삿갓 그가 걸어 다녔겠다고 생각되는 길을 아련한 생각을 떠올리며 천천히 달린다. 주천을 지나 영월 땅 입구에 있는 책 박물관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고 박물관을 잠시 둘러본다.

 

1900년대 초의 허름한 책들이 교과서 중심으로 전시되어있었다.

“오늘은 개천절입니다.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시가행진하였습니다.”

1953년에 우리가 배웠던 국어책의 한 구절이다.

1946년대에 출판한 ‘육사’ ‘정지용’의 시집도 눈에 들어왔다.

한족 귀퉁이에 김삿갓의 빛바랜 시집이 나를 더욱 흥분케 함이 당연하였다. 지금 나는 시집의 주인공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그의 유작을 만났기 때문이다.

 

영월을 지나면서 잠시 들른 곳이 세조가 조카 단종을 유배 보내 죽게 한 단종의 묘가 있는 장릉이다. 관음송의 허리 굽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 같다.

폭염 속에서도 삼촌의 비정함에 숨져간 단종을 생각하니 신열의 체온이 떨어지는 것 같아 김삿갓 유적지를 찾아가는 길이 한결 수월했던 것 같았다.

 

고씨동굴을 휘감으며 흐르는 동강에는 레프팅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함성은 섭씨 34도의 불볕더위를 동강의 세찬 물길에 시원하게 씻어 내리는 듯했다.

12시가 되어서야 영월군 영춘면 의풍리 김삿갓의 시비 앞에서 차를 멈추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니 남양주 집에서 4시간을 단숨에 달려온 셈이다.

 

주차장에서 조금 올라가니 초라하기라도 한 난고 김삿갓의 유적지 구내는 산 계곡을 그대로 이용하여 조성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선별하여 설치한 시비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면서 나는 고난의 시에 도취해 더운 날씨도 나를 큰 문제로 삼지 않아 사진을 찍으며 돌아보는 나는 고기가 물을 만나듯 난고와의 특별한 인연의 고리가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난고의 묘소 앞에 발걸음이 멈추어 선다.

초라한 묘역 역시 한 시대가 싫어 은둔의 생활을 자처한 그의 사후를 누가 신경을 써서 돌보아 주었겠는가 싶다.

하기야 그의 사상과 삶이 어쩌면 지금의 이 모습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난고의 작품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 삶이 그의 삿갓을 내가 받아쓰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동병상련의 잔잔한 아픔이 가슴을 훑이고 지나간다.

 

그가 은둔의 생활을 했다는 생가는 1.5㎞ 정도 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더워서인지 찾는 이가 아무도 없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어 적막감마저 들어 금방이라도 옛날의 도적 때가 나와 우리 가족들을 해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좌우를 보아도 빠끔히 하늘밖에 는 보이지 아니한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백산을 주산으로 하는 경상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도의 접경이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찾는 이가 없음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와서 복원한 집이라 방랑 시인의 집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고난은 이곳을 은거지로 하여 전국을 떠돌면서 풍류와 해학을 곁들인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이 터 위의 세워진 난고의 집 앞에는 다래 덩굴이 늘어지고 흐르는 계곡물마저 그에게는 좋은 친구였음에 틀림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처마에 걸터앉아 잠시나마 난고 김삿갓을 생각해 본다.

과연 그는 그 시대가 낳은 출중한 선비요 문인이었구나. 오늘 그와 만남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산천의 푸른 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하며 하산을 서두른다.

 

난고는 이곳에서 속세에 물들지 않으면서, 시와 술로 근심을 잊으며 자연과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그린 자영(스스로 읊는다) 시가 생각이 난다.

 

“겨울 소나무 외로운 주막에

한가롭게 누웠으니 별세상 사람일세.

산골짝 가까이 구름과 같이 노닐고

개울가에서 산새와 이웃하네.

 

하찮은 세상일로 어찌 내 뜻을 거칠게 하랴

시와 술로써 내 몸을 즐겁게 하리라.

달이 뜨면 옛 생각도 하며

유유히 단꿈을 자주 꾸리라. “

 

이번 여행은 참으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의풍에서 부석면 남대리를 지나 경북 영주시 부석면으로 가는 비포장도로인 마구령을 넘어 북부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이 학교는 오래전에 학생이 없어서 폐교한 뒤, 뜻이 맞는 예술인들이 세를 얻어서 그들의 예술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교정을 들어서는 순간 나를 마중이나 하려는 듯 다가와서 인사를 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서 오시는 분이세요.”

“잘 오셨습니다.”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자청하여 이곳에 관해 설명한다. 듣고 동행한 처와 딸의 손을 잡고 갤러리를 둘러보고 나오니 관리하시는 분이 작업실과 소품실을 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닌가! 넓은 작업실에는 작업 중인 유화가 컴퍼스에 걸려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소품실에는 어떤 연극이나 영화를 소화할 수 있는 소품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처와 함께 딸 명숙이가 권하는 용포에 족두리를 하고 전통 혼례식을 하듯 사진을 찍었고 딸은 어우동의 장구춤을 연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 김삿갓 차림을 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더욱더 감동적이었다.

김삿갓 유적지에서는 감히 생각조차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을 이곳에서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우리 가족들 하나같이 너무 좋아했다.

‘이것이 바로 이번 테마 여행의 진수이고 묘이구나.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처와 명숙이에게 여행의 소감을 물어봤다. 둘 다 같은 말로 화답을 했다.

“삼복더위 속에서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되어 기억에 오래오래 남아 좋은 추억이 되었다.”

고 환하게 웃으며 다음 여행 계획에도 꼭 동행하겠다고 서둘러 묻지도 않은 약조를 다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번 짧은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개인적으로 가족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소중했으며 함께 얻은 것이 너무 많고 커서 모처럼 운이 좋은 사람 같았다. ◁

 

200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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