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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교회는 공회전하면 안 돼

노파 2011. 6. 3. 07:33

 

교회는 공회전하면 안 돼

장지원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지 못하고 줄어든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십일금을 비롯하여 각종 연금의 수치마저 교인 수의 비례해 감소하고 있음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교회는 물론이요. 기관들의 살림살이가 예년에 비해 어렵다는 것이 일선 지도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가 되어버렸다. 자칫 잘못하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고 짖는” 격이 된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진정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헤 처 나갈 수 있는 주님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 해법은 무엇일까? 일의 심각성만큼 대처하는 자세 또한 교인들이 주목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우리 교회의 재정 원은 교인들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외형을 평가하는 수치에 관심과 힘을 기울일 때는 아닌 것 같다. 지금 교회가 직면하는 헝클어진 실마리를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할지 우리의 세심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한 때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신종문화에 밀려나는 신앙 정서

오늘 우리 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정체 국면에 서 있다.

레이스에서 반환점을 돌아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여기서 성도들은 할 말이 없는 건지 묵묵부답이다. 언제부터인지 교회 안에서도, 목사와 교인, 교인 상호 간에도 서로서로 배려하는 차원의 보이지 않은 예의를 생활 규범의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사는 모습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부담으로 정착하는 거는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러한 신종문화의 발생 원인과 장, 단점을 생각할 수 있다면 성도들의 교회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옛날에는 고구마 감자를 삶아놓고도 허물없이 교인들을 청하였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한데 어울려 밤을 새우는 환담 속에서 교회는 힘을 받으며 성장했다. 강단에서는 성도들의 회계와 개혁을 부르짖는 기별이 직설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때마다, 개혁은 조용히 변화의 물결을 타게 되었다. 성도들의 얼굴에서는 잔잔한 미소와 아멘 의 기도가 새벽마다 문틈으로 용천수처럼 흘러나왔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6, 70년대를 돌아본다.

그땐 생활이 어려워 품을 팔아서도 헌금을 드렸다. 하나님의 사업이 일차적 우선순위였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께서 만나러 먹여 주신다는 믿음 있었다. 지금 우리의 수입이 그 당시에 비하면 백배에 많게는 천배 이상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 삶을 즐기는 것이 사실일진대 신앙생활에도 전에 보지 못하는 여유로움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의 활동 무대는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생각하는 사고력은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각종 규제와 이기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조화롭게 안정시켜 보아야겠다는 우리만의 특유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말씀이 깊이 있게 선포되지 못하는 강단이 우리의 신앙 정서를 더 메마르게 부채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생긴다.

 

갈릴리 해변에서 하늘의 기별이 선포되고 구원의 복음이 전파된다.

그때 주님을 쫓아다니던 군중의 소리가 지금도 복음서를 열면 들을 수 있음을 추억 속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는 목회자만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세상사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우리의 몸도 마음도 병들어 있는지도 누가 알겠는가?

 

하루에 수천 명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침례를 받았다.

무리의 뒷바라지를 위한 제자들 역시 하루의 봉사가 끝나고 해질 때는 그들 역시 피곤하고 지쳐있었다. 주님은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라고 하신다. 육체적 안위와 영적 신앙의 리듬을 찾아 주시곤 하셨다. 이 일은 상당히 돋보이는 대목이다.

 

조선 초기 태조(1400년)는 선농단을 만든다.

절기 중 경칩이 지난 이후 왕은 한해의 농사를 위해 하늘 신께 (신농씨와 후직씨) 한 해 농사를 위해 경건한 재사를 올린다. 왕은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깃발 아래서 직접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모범을 백성들 앞에서 보였다고 한다. 이날의 축제에는 음식을 풍성히 장만하여 구경나온 백성들이 잠시나마 주린 배를 체 울 수 있었다. 농경사회를 주도하는 백성들은 나라의 배려에 감사하며 즐거워했다. 농사철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좋은 기회도 되었으며 농부들에게 적지 않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가 쉴 수 있는 날이 안식일이다.

축복의 장소가 교회라고 한다면 교인들은 손꼽아 안식일을 기다렸다가, 약속된 장소에 나와서 축제의 안식일을 즐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외형에 집착하면 안 돼

교회가 십일금 표준을 능가해야 하고 침례 자를 많이 내야 한다는 게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당장 침례 자를 안내면 연차적으로 교인의 수가 줄어들고 헌금이 감소하게 된다. 이에 맞물려 있는 모든 사업은 어려움을 맞게 된다. 이런 논리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론과 논리를 부정하거나 반박하고 싶지 않다. 매년 수침 자를 낸다고 보면 4, 5년이 지나면 교회는 배로 성장해야 한다. 당연히 교세가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교단 적으로 보아 교인의 숫자가 감소 일로에 있다고 한다. 행정을 하는 지도자의 처지에서 이러한 보고를 놓고 어떻게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을는지 기대해봄도 재미있을 것 같다.

 

자동차는 공회전을 지키면 안 된다.

아까운 연료만 소모되면서 일산화탄소를 배출하여 대기를 오염시킨다.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쯤은 이제는 어떤 형태의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엔진에도 무리가 가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손실을 알면서 쓸데없는 공회전을 왜 시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일종의 개인 이기주의에서 파생된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교회가 공회전을 계속한다면 피곤해하는 계층은 결국 교인들이다.

자동차의 엔진이 열을 받아 깨지듯이 말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자동차에서는 엔진의 소중함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회 안에서도 지위 고하를 망라해 계획적이면서도 지속적인 볼링이 필요하다.

 

영적으로는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영감 적인 말씀이 필요하다.

지도자들의 몸에 밴 근검절약과 헌신이 교인들에게 하늘의 태양처럼 밝고 맑게 비쳐야 할 것이다. 교인들 역시 마지막 시대의 주자로서 준비된 생활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때임을 망각해서는 우리의 정체성마저 희석될 수 있음에 주의가 요망되기도 한다.

 

□ 우리 교회도 향수가 있다.

새것만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살면서 안 바꾸어야 하는 것이 있다. 신랑이 신부를 바꾸어서는 안 되고 신부가 외간 남자를 집 안방으로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연어가 어릴 때 떠나온 고향을 찾듯이 우리는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에덴동산이 있다. 그리워하며 사모하다 그곳에 가야 한다. 따라서 옛것에 대한 향수가 더 크고 진한지도 모른다.

 

집안이 편하고 살림이 흥하자면 안방 시어머니의 이야기와 부엌에 있는 며느리의 말이 같아야 한다. 어느 한쪽인들 편애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가 우리 교회 안에도 목사들의 수난 시대를 맞은 것 같다. 턱없이 장로들이, 교인들이 목사를 배척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교인들과 교회는 힘든 일루를 걸어가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교인들을 세상의 갖은 문화로 족쇄를 채우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모든 활동의 제약을 받으며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살아가고 있다. 기억 속의 옛날의 신앙을 되뇌리며 기도 생활로 일관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음을 인해 그나마도 마음이 든든하다. 일 년에 한두 번의 신방으로는 교인들과 목사의 관계는 원만한 관계라고 말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있다. 오늘 잘못 되어 가는 우리의 신앙 정서를 안정시키고 내실 있고 발전 지향적인 교회를 진정 바란다면, 목사는 바쁘고 잡다한 행정에서 한발 물러나야 한다. 믿음과 소신을 겸비한 장로들의 조력이 필요할 것이다. 교회는 균형을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폄하 우월주의는 지금부터라도 교회 안에서 사라져야 한다.

 

육신 적으로, 영적으로 교회의 엔진 격인 교인들이 속히 원동력을 회복해야 한다. 탄력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 각도로 연구되고 검증된 방안들이 간구 돼야 할 것으로 본다. 옛날부터 우리 교회는 타 교파와 달리 진리를 수호하며 우리만의 전통을 이어오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외길에서 몸부림을 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선교 10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 우리 교회만이 가진 향수가 있다면, 나는 지금도 그 향수에 흠뻑 취하고 싶다. 노독들의 신앙에 비교되지 아니하는 신앙만이 삶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교인들이 지향해 나가야 할 나침반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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