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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흥선 大院君의 정치

노파 2011. 5. 18. 15:03

大院君 그의 정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장지원

 

 

흥선 「대원군」(1864-1873) 그의 등장은 조 대비의 수렴청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흥선군 그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미치광이처럼 한 많은 젊은 시절을 보냈다.

 

정치의 야욕은 불타고 있었다.

이때 당대의 풍수지리에 명지관 「정만인」을 만나게 된다.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옮겨야 하는데 명당자리를 달라고 한다. 명당자리는 가야산자락 가야사가 자리하고 있는 탑신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1822년 연천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가야산 기슭에 임시로 모신다. 이웃 마곡사의 주지에게 2만 양의 뇌물과 충청감사에게 중국 명품 단계 벼루를 주며 가야사의 중들을 쫓아내 달라고 밀지를 내린다. 마곡사 중들은 가야사(伽倻寺)에 불을 지르고 중들을 쫓아낸다. 1845년 드디어 가야사 탑 자리 명당(明堂)에 아버지의 묘를 쓰게 되고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遲遲) 꿈의 실현을 이루게 된다.

 

그 7년 후 아들 「제황」을 낳게 된다.

그로부터 11년 후 1863년 「흥선군」의 아들이 「고종」이 된다. 대한제국의 첫 황제가 되며 「흥선군」은 역사의 지울 수 없는 「흥선 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된다. 그의 야심적 정치는 변하는 국제정세를 바로 읽지 못함과 국내적인 정치 기반의 무력함은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주변국 일본의 대륙침략과 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2번에 걸친 변란은 승리했지만 「흥선 대원군」의 정치적인 아집은 결국 쇄국정책으로 이어지며 곳곳에 두 번의 변란을 기념하는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를 탄압하고 서양 민족과 화친하는 자는 나라를 파는 자라고 하였다.

 

이즘「 대원군」을 추종하던 「화서 이항노」 「화서」의 제자 「최익현」은 「고종」 10년(1873년)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게 되고,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고종」은 친정을 펴게 된다. 「명성황후 민비」의 실권 개입은 「대원군」의 하야로 몰고 갔으며,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대원군」의 정치도 막을 내린다. 여기서 잊지 못할 기록이 있는데 경복궁 중건이다. 백성들의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한 세금 부담과 노역 부담은 그나마 어려운 나라를 더욱 힘들게 하였으며 백성들의 원성은 자자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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