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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공민왕 과 신돈

노파 2011. 5. 16. 08:57

공민왕 과 신돈

장지원

 

 

고려의 “공민왕”은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두 번이나 밀려나는 어려움을 겪은 왕으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가 왕(4년)이 되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반원 개혁을 단행한다. 이에 맞선 원나라의 홍건적은 공민왕 10년에 15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한다. “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안동까지 피난을 가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때 원나라는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는 내정에 간섭하게 된다. 고려는 또 한 번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이때 ‘공민왕’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무장들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원나라와 홍건적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자 공민왕의 지도력은 크게 약화 일로를 걷게 된다. 군신들은 탐욕에 눈이 멀게 된다. 서로의 허물을 가려주므로 초야 신진들의 눈마저 어둡게 하여, 권력층의 사위가 되는 것을 출세의 가도로 생각게 한다. 이에 따라 신진 유생들조차도 그 강직함이 유약하게 되고, ‘문생좌주 동년 동문’이라 칭하며 불의에 얽히고설키어 나라와 사회가 혼탁하였다고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이 정국 상황에서 “공민왕”은 정사와 비뚤어진 사회를 바로잡기로 용단을 내린다. 세상의 때 묻지 않은 승려 “신돈”(여기서 “신돈”의 신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면 아버지 묘가 창녕에 있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사대부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특출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신돈”은 유아 시절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승려의 길에 입문함.)을 1365년에 정치 일선에 세운다.

 

‘신돈’은 매사를 명백하게 논증했고 스스로 도를 통했다. 평소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에게 국사를 망령스럽게 쓰지 말라. 내가 장차 살펴보리라고 말했다. 하니 학문적인 소양과 국정에 대한 식견도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신돈’은 정치에 관심 없이 없었다.

평생을 승려로 살아왔기 때문에 정치에 연연하지 않았다. 일가붙이도 없고, 부와 재산을 축적하지도 않았다. ‘공민왕’의 개혁주도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공민왕’에게는 속세에 물들지 않은 ‘신돈’이야말로 자신을 대신해 줄 사람으로 인정한다.

 

‘신돈’은 제일 먼저 최영 장군을 비롯한 무장 세력을 축출하고 왕권을 세운다. 다음 정치세력 전반에 인사 개편을 대대적으로 착수하게 된다. ‘신돈’의 개혁은 모순의 주체, 그들을 척결하고 하나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점차 성장하게 된다.

 

개혁의 바람이 불게 된다.

착취당하던 양민들, 억압과 수탈의 세월을 살던 종, 노비들이 벌 떼같이 나와 성인이 나왔다. 고 좋아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즘에 ‘공민왕’은 정치생명의 위기를 느끼게 된다. 개혁과 현실이란 양면성에서 고민하게 된다. ‘신돈’이 왕권에 도전한다. 하여 ‘신돈’을 반역의 죄로 몰아 수원에 유배 붙여 이틀 후 살해한다. ‘신돈’이 처형된 후 정치 분위기는 일변하기 시작한다. ‘전민변정사업’의 개혁은 중단되고, ‘공민왕’도 의문의 암살을 당하므로 한 시대가 마감하게 된다.

 

오늘 우리는 인간의 양면성이 얼마나 간사하고 치사스러운지를 보게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지도자상은 공민왕과 같이 유약한 사람이 아니라 소양과 정의에 흔들림이 없는 ‘신돈’과 같이 강직함으로 하늘만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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