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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입추 조회

노파 2011. 8. 10. 10:42

 

할아버지의 입추 조회

장지원

 

 

오늘이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다.

예전 같으면 어김없이 할아버지는 아침 조회를 여셨다. 팔 남매와 이웃에 사는 집안을 모두 참석시키는 아침 식사는 오래만 에 잔치를 연상하는 연례행사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입추 조회는 조상님들의 선산에 벌초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시월 시사까지의 날을 받는 일이다. 벌초하는데 필요한 일손도 직접 배정을 하시곤 하셨다. 조상들의 산소는 할아버지에게는 삶의 한 부분이었고, 자손들을 염려하는 가문의 어른으로서의 특별한 신앙이었던 것 같다.

 

시끌벅적한 아침 식사가 끝나면 바로 조회가 열린다.

할아버지는 조선 말 종구품의 능참봉이란 말직에서 일을 하셨다. 큰아버지는 늘 할아버지의 일을 교과서 가르치듯 말씀하시기 좋아하셔 수 없이 들었던 터라,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경력이 할아버지에게는 몸에 밴 듯 스스럼없이 벌초와 시사를 짚어 나가시는 게 아랫대의 기를 살리기도 하고, 꺾기도 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벼루에 먹을 갈고, 한지 뭉치로 된 두툼한 책을 펴고 의논되는 모든 이야기를 한서로 모두 기록하는 일을 하셨다. 이 시간만큼은 모두가 긴장이나 한 듯, 사랑은 시종 조용하기만 했다. 어느 정도 의논이 마무리되면,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의상아, 의논한 것 다 들을 수 있도록 한번 읽어 봐라.” 엄명을 내리신다. 집안 회의도 이렇게 하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 주시는 할아버지이셨다. 어린 내 눈에도 그분은 특별하신 분이셨다.

 

부엌에서는 종부를 비롯해 여자들이 조회가 끝나길 기다리며 음식을 차린다.

집에서 담근 농주에 적과 여러 가지 안주를 곁들여 사랑으로 내어 온다. 남자들은 모두 막걸리를 한 잔씩 받아놓고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렸다. 술을 마시는 고모들도 한 잔을 달라고 하여 함께 잔을 받는다. “한 해 농사에 애들 많이 썼다. 욕봤구나,” 하시면서 할아버지가 먼저 잔을 비우시면 그때부터 이야기와 웃음이 터져 나온다. 누구보다도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이 술에 발동이 걸려 집안의 말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입추 조회는 끝이 난다.

 

할아버지는 참봉의 말직에서 밀려 나오시면서 가세가 기울어져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아들 둘에게는 글을 가르쳤으며, 아울러 유교의 제례만큼은 잘 가르쳐 타의 모본이 된 것은 우리 고장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오랜 세월 마을의 어른으로서 평생을 사셨다. 그 영향은 지금의 우리 대에까지 그 맥을 이어 오는 것 같아 늘 나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하다.

 

20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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