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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인간의 본능은 살아 있는 표본이다.

노파 2011. 8. 9. 08:15

 

 

인간의 본능은 살아 있는 표본이다

장지원

 

 

인간에게 있어 본능처럼 무서운 게 없다.

먹고 사는 모든 행위가 일차적으로 본능에 의한 자의적인 활동이라 보면 되겠다. 내가 어릴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큰길을 질러가는 길을 택하여 걸어가게 되었다. 특별한 일이나 의미가 없이 무작정 험한 논둑길을 택하여 걷고 있었다. 논둑은 높고 험하여 독사나 구렁이가 많이 살 수 있는 조건이 충분하였다. 어린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한쪽으론 넓은 논의 벼가 자랐고, 다른 한쪽은 벼랑 같은 험한 비탈이어서 몸이 자꾸 좌측으로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 농촌의 아이들에겐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일상의 생활이요 삶의 한 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각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생각 없이 본능적인 반항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키는 대로 무작정이다. 그냥 해보고 싶어서인 것이다. 어린 나에겐 감수성이나 낭만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전부였다. 성인이되 늦게 글을 쓰는 자기 과거의 한 페이지를 끄집어내 글로 옮기고 있다. 나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다. 그 당시 그 상황에 대해 한 줄의 일기나 감상문 따위는 사치가 아니었으면, 무식에서 나온 무지한 행동이었으리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주변은 온통 위험과 사고가 언제나 예외 없이 도사리고 있었다. 겁 없고 철없던 그 시절의 방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모든 기관은 완벽한 부품으로 구성되어있다. ‘고 말했다.

인간의 잘나고 못남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부모의 삶 속에서 사랑의 판타지가 놀고 간 뒤 생각지도 않게 떨어진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생에 대한 특별한 본능을 지닌 것을 모든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누가 지시하거나 운전하지 않아도 저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살아가는 영장임이 틀림없다.

 

나에게도 일찍이 그런 기능이 본능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날 그 험한 논둑길에서 있었던 일은, 오늘날 신세대 부모들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가정한다면 모두 기절하고 까무러칠 일이고도 남는다.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수해치(씀바귀, 토기가 잘 먹는 풀) 가 엄청 많이 자라고 있었다. 순간 집에서 내가 올 때까지 배고프게 기다리고 있을 두 마리의 토끼가 내 관능을 자극하여 나를 흥분 시킨다. 책보를 어깨에 대각선으로 단단히 멘다. 가슴이 조금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작업하기에 더 좋을 것 같았다.

 

가슴에 차는 풀을 헤치며 가파른 언덕을 비스듬히 내려간다.

내 앞에 복병이 나타났다. 너불메기(뱀의 일종)가 똬리를 틀고서는 꼼짝을 하지 않고 나를 째려보고 있다. 놀란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카락은 모두 하늘을 보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돌을 두 개 집어 들고는 조준해서 힘껏 때렸다. 명중했다. 한 번 더 머리를 명중시켜 가볍게 해치웠다. 나무 꼬챙이로 죽은 뱀을 떠서 멀리 던지고 나니 내 앞에 보이는 수해치가 더 크게 바람에 흔들리며 빛나고 있었다. 토끼를 생각해 정신없이 꺾으니 여러 줌이 되었다. 마 덩굴을 걷어 단으로 묶어 겨드랑이에 끊어 안고 조심조심 비탈을 올라와 논둑길을 다시 걸었다. 무언인가를 해 냈다는 생각에 휘파람이 나왔다.

 

한여름 날씨는 온 들에 생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한 참 걷던 나는 이마에서부터 흐르는 땀은 허리띠에서 한 방울 두 방울 고이더니 러닝셔츠가 온몸에 감기면서 이놈이 나의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그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큰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곳 깊은 곳에서 언제나 멱을 감고 했다. 수해치 위에다 책보를 풀어 놀고 땀에 젖은 옷을 입은 체 풍덩 맑은 물에 뛰어드니 기절해 가던 내 목숨도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땀을 씻고 옷을 벗어 빨아 꼭 짜서 탁탁 턴 다음 따끈하게 단 돌 위에 널었다. 옷이 마르자면 두 시간은 족하게 걸릴 것이다.

 

발가벗은 몸으로 이번에는 고기를 잡기로 했다.

작은 돌을 재 키면 손등만 한 가제가 도망갈 줄도 모르고 내 손에 잡혔다. 큰 돌 밑에는 꾸구리(민물고기)가 얼마나 큰지 아이들 고무신만 한 놈이 보였다. 이놈은 얼마나 멍청한지 손을 모아 앞에 대니 그것이 제집인 양 손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잡은 고기가 아홉 마리가 되었다. 징그미(민물 큰 새우 종류) 한 마리를 더 잡아 열 마리를 채웠다. 이것이 본능적인 행동이 아니고 먼가. 바보같이 잡혀준 물고기의 배를 따고 버드나무 꼬치에 고기를 차례로 꿰었다. 나는 신이 났다. 바위에 널어놓은 옷은 빳빳하게 말라 입으니 새 옷을 입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집엘 왔다.

어머니는 나의 대한 하루의 안부나 걱정은커녕 내 손에 들린 물고기에 관심이 더 큰 것 같았다. 어머니 손에 물고기를 건네주곤 곧바로 토끼장엘 가니, 하루 종일 굶은 토끼가 이리저리 뛰며 반갑다고 한다. 어쩌면 나보다 내 손에 들린 수해치가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토끼가 커 가는 재미에 힘이 나고 기쁘기만 했다. 예상대로 저녁상엔 내가 잡은 물고기 매운탕이 올라왔다. 점심을 먹었는지는 기억조차도 없고 배가 고팠던 참에 한 그릇을 비우고 더 달라고 하니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시더니 누룽지 그릇을 내밀었다. 바닥에 깔린 누룽지에 물이 한 그릇이었다. 그걸 다 퍼 넣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옛 기억을 찾아보니, 내 어린 시절 유년의 하루는 본능에 이끌린 인간의 처절한 삶의 성장기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본능은 내면적 삶의 전부였다.

여렸을 때 본능적 활동은 촌스러웠기도 하다. 순박하여 전혀 공해가 없어 어디 나무라거나 흠잡을 데가 없는 살아 있는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본능도 변질한다. 삶의 더 짜릿한 쾌감을 쫓아가는 성향은 보편화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본능은 인간의 본디 그 원시성을 떠나 가공되고 조미된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경향이 있다. 본능도 쾌락이 있어야 하고, 환상적 판타지를 쓸 수 있어야 움직이는 관능적인 선택의 여지를 의심하게 된다. 어쨌든 주검은 인간 본능의 활동이 정지된 상태다. 그래서 본능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만 활동하는 인간의 살아 있음을 대변하고 있다.

 

20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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