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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노파 2026. 7. 2. 00:02

 

2026년7월2일[대선지서-이사야8장9-15절]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장지원

 

 

9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10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11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

12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주> 9 너희 민족들아: 문자적으로 “너희 백성들아”이며 그 의미는 “너희 나라들아”이다. 이사야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기를 “함께 도모하”는(10절) 이방 나라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경고한다. 9절의 시적 형태에서 “너희 민족들아”라는 말은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라는 구절과 평행을 이룬다.

훤화하라: (제임스왕역(KJV)에는 “associate yourselves”[연합하라]-역자 주). 히브리어 로우(ro‘u). “나쁘다”, “즐겁지 않다” 또는 “깨뜨리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라아 (ra‘a‘)에서 왔다. 따라서 로우는 “즐겁지 않다” 또는 “깨지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불가타역 번역자들은 모음점이 없는 히브리어 본문을 택하여(참조 제1권, 25, 35, 36), 로우라는 단어를 “교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아(ra‘ah)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겼으며, 결과적으로 로우를 콘그레가미니(congregamini) 즉 “모이라” 또는 “연합하라”로 번역하였다. 제임스왕역(KJV)은 불가타역의 이 해석을 따랐다. 70인역 번역자들은 로우 대신 데우라고 되어 있는 어떤 히브리어 본문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이 데우를 헬라어 그노테(gno-te) 즉 “알다”로 번역하였다. 히브리어 글자에서 r(r)과 d(d)는 그 모양이 거의 똑같아서 서로 바꾸어 쓰는 실수를 저지르기가 매우 쉽다(실례로 창 10:4; 25:15; 수 9:4; 삼상 12:11; 삼하 8:12; 23:30 주석을 참조하라). 데우는 그 뿌리를 야다(yada‘), 즉 “알다”에 두고 있으며, 데우라는 형태는 “너는 알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데우는 문맥과 좀 더 잘 조화를 이루는 해석을 보여 주며, 영어로는 “take knowledge”(지식을 얻으라) 또는 “know ye”(너는 알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사 8:9이 시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으며, 이런 경우에 “너는 알라”라는 번역은 “들으라”는 말과 평행을 이루는 것이 된다.

10 함께 도모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좌절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악한 자들의 모든 계획을 무력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아하스 시대에 그렇게 하셨으며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니라: 히브리어 임마누 엘(‘Immanu ’El). 같은 단어가 8절에서는 문자 그대로 “임마누엘”로 번역되었다. 9절과 10절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마음에 심어 주고자 애쓰시는 임마누엘 기별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결국 앗수르의 계획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취되지 못할 것인데, 그것은 그분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 때문이다(참조 10:5~12). 이사야는 이 임마누엘의 기별을 유다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선포하였으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간직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 왕이 그중 하나였다. 산헤립이 유다를 치러 왔을 때, 히스기야는 다음의 영감적인 말로써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 32:7, 8). 히스기야가 주님을 신뢰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고, 마침내 185,000명에 달하는 산헤립의 군사들이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죽임을 당했다(왕하 19:35).

11 이 백성의 길: 이사야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유행적 풍조에 굴복하지 말아야 하였다.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라는 구절로써 이 명령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바른 행동 방향이 무엇인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

12 너희는…하지 말며: (제임스왕역(KJV)에는 “say ye not”[너희는 말하지 말라]-역자 주). 비록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분은 “이 백성”(11절)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히브리어에서 “너희”는 복수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15절까지 백성들에게 말씀을 계속하신다. 16절에서 그분은 다시금 이사야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맹약한 자: (제임스왕역(KJV)에는 “confederacy”[동맹]-역자 주). 히브리어 케셰르(qes∨er). 이 단어가 나오는 경우의 절반 이상이 “반역”(개역한글판에는 “모반”, “반역”, “배역” 등으로 번역됨-역자 주)으로 번역되었다(삼하 15:12; 왕하 15:15, 30; 겔 22:25 등). 대하 23:13과 다른 곳에서는 “반역”으로 번역돼 있다. 오직 사 8:12에서만 “맹약”으로 번역되었다. 이런 경우에 그것은 어떤 사람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형성된 연합을 의미한다. “맹약”이라는 단어에 제임스왕역(KJV)이 기록될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불법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아직도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긍정적 의미의 “동맹”을 의미하는 데 사용된다. 이 단어가 여기에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전자의 경우이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대항하여 함께 모의 또는 “맹약”하였고(7:2, 5, 6), 아하스는 이스라엘과 아람을 대항하여 앗수르와 동맹을 맺었다(왕하 16:7~9).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공모 또는 맹약을 두려워하였으며, 그것에 맞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방 족속과 연합하였다. 아하스가 주께로부터 책망받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이방의 도움을 더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우상 숭배자들과 동맹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세상과 구별하고자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고를 들어야 하며 그분 안에서 능력을 발견하여야 한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수 있으며,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그분의 사업을 그분의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떤 종류의 동맹이라도 맺게 될 때, 사람의 정책들이 불가피하게 하늘의 원칙들을 밀어내게 되며 주님의 사업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우리의 힘은 세상과의 밀접한 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완전히 분리됨에 있다.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거룩하다 하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이상을 보았고(6:1~4), 따라서 이제 유다 백성들로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인식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거룩함에 대한 이상을 보지 않는 한 거룩함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었다.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참조 신 4:10; 6:2 주석.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하스는 베가와 르신을 두려워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을 무서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함으로 그 앞에 있는 것이며,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기쁨으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14 거룩한 피할 곳: 히브리어 믹다쉬(miqdas∨), “거룩한 장소”, “성소.”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하는 자들(참조 13절 주석)은 그분 안에서 위험을 막아주는 피난처를 발견할 것이다(참조 시 91:1 주석). 이사야는 백성들을 세상의 사물에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리스도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참된 “성소”이다.

거치는 돌: 예수님은 자신을 반석으로 언급하였다(마 21:42~44). 바울은 사 8:14의 이 구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했으며(롬 9:33), 베드로는 그것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적용을 언급하였다(벧전 2:6~8).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채석장에서 떠온 한 커다란 돌이 있었는데, 그것을 놓을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성전 터의 한쪽 구석으로 옮겨 놓았다. 그 돌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고 버려진 채 건축자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 돌은 전체 구조물 중 가장 중요한 모퉁잇돌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결국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497, 598). 예수님은 오랫동안 거절되어 온 유대교의 모퉁이 돌이시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그분은 거치는 돌이요 걸리는 반석이다. 그분은 항상 그들의 길 한가운데 계셔서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계획들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악한 의도들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 그들이 거쳐 넘어지는 그 돌은 다름 아닌 “참하늘”의 기초 돌이며, 그가 없이는 이 세상과 우주의 모든 생명, 기쁨 그리고 평화가 존재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두 집: 이 구절은 이사야가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과 소망의 성소이기보다는 오히려 거치는 돌임을 발견하고서 그분과 그분의 율법에서 등을 돌렸다.

올무: 돌의 비유는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덫의 비유로 대체될 수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기별은 예루살렘에 거하는 악한 거민들에게 덫 또는 올무가 될 것이었다. 생명이요 소망이며 모든 인류의 피난처가 되어야 할 그분은 그분의 길을 걸어가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올무가 됨이 입증될 것이다. 만일 악한 자들이 그들의 악한 길을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고 걸어가도록 허락된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과 땅의 모든 거민을 매우 신속히 멸망시킬 것이다. 지구상에서 생명이 지속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활동을 멈추게 하시는 명령과 그들로 허락된 범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시는 어떤 제어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 함정과 올무가 되심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인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구상의 어떤 거민들에게도 평화나 기쁨 혹은 자유나 희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5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우선적으로는 이사야 자신의 시대에 사는 백성들을 지칭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과 반대되는 길을 걷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책망을 거절할 때,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다. 영적 분별력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기별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종종 그 기별들이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게 할 것이다. 영적 통찰력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은 아무도 올무에 걸릴 필요가 없다.

 

202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