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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노파 2026. 6. 2. 00:02

 

2026년6월2일[대선지서-이사야1장10-17절]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장지원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주>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소돔”이라는 칭호는 유다가 전체적으로 소돔과 유사한 상황 속에 빠져 있다는 측면에서 상징적으로 그 나라를 지칭해서 쓴 말이다. 여기에서 이 칭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공언하는 나라에 대한 끔찍한 기소장 역할을 한다. 이 나라의 통치자들은 여호와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서 그 정책과 행위 면에서 이 땅에서 죄를 가장 크게 범한 민족들의 통치자들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있다. 따라서 이제 그 지도자들에게 매우 엄숙한 소환장, 곧 회개치 않으면 그 나라 전체가 처하게 될 운명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기별이 주어졌다.

11 무엇이 유익하뇨: 유다는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매우 신실한 나라였다. 성전에서 수많은 희생제물들이 드려졌지만 참신앙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공언하면서 종교의 외형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정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희생제물은 즐겨 드리고자 했지만 자신들의 마음을 여호와께 드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의 형식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하였다. 이사야는 그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일련의 날카로운 질문들을 통해서 오직 외형만을 갖춘 종교는 하나님이 불쾌히 여기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 주고자 하였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대변자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며 의식이 아니라 의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애썼다(참조 삼상 15:22; 시 40:6; 51:16~19; 렘 6:20: 7:3~12; 14:12; 호 6:6; 암 5:21~24; 미 6:6~8).

12 내 앞에 보이러 오니: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오다”라는 표현은 대성회 시에 성전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관용구이다(시 42:2; 84:7; 출 34:23).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이 성전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는 올바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성전이 여호와가 그들 중에 거하시기 위한 장소로 건축된 것은 사실이다(출 25:8). 하지만 성전을 찾는 사람이 모두 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는 이사야를 통해서 그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사 57:15)고 선포하신다.

13 헛된 제물: 뉘우침과 참된 회개의 마음이 없이 드리는 제사는 헛된 제사였다(삼상 15:22; 마 5:24; 막 12:33). 그 같은 제사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가증히 여기는 바: 여호와는 그에게 드리는 향기로운 향의 제사를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매우 불쾌히 여기셨다. 종교의 형식이 참된 정신을 상실하면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순종이 따르지 않는다면 기도까지라도 가증한 것이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잠 28:9).

월삭과 안식일: 여기에 언급된 성일들은 왕하 4:23; 대하 8:13; 암 8:5 등과 같은 성경절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성일들을 준수하는 것은 히브리 종교의 핵심적 요소들 중 하나였다. 여호와께서 직접 이날들을 지정하셨으며, 또한 이스라엘에게 이날들을 준수하도록 요구하신 분도 그 자신이시다(출 23:12~17; 레 23장; 민 28, 29장; 신 16:1~17). 하지만 이 같은 종교 형식들에 대한 외형적 준수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의가 결여된 의식과 형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명령에 따라 지키는 성일들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순종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를 불쾌히 만드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악한 삶을 살면서 성회에만 참석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이사야 시대에 히브리 사람들은 종교의 형식은 “길게” 행하고 의는 “짧게” 행하였다. 많은 사람이 의문(儀文)의 율법이 말하는 의식에 관한 요구들은 철저히 따르면서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그의 명령들은 공공연하게 범하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행위는 종교에 대한 조롱이요 치욕이었다.

14 내 마음이…싫어하나니: 이것은 외적으로는 매우 신실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종교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 일들에 관여하였다. 하지만 여호와는 자신이 그들의 행위를 매우 불쾌히 여긴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정해진 절기를 지키는 것을 싫어하셨으며, 그들의 예배를 거절하셨고, 그들의 외식적 겉치레에 대해 노를 발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길을 따라 행하기를 거부함으로 사실상 그를 무시하였다. 어떤 종교적 형식주의의 가면도 그들의 죄를 덮어 줄 수는 없었다.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히브리 사람들은 기도드릴 때 종종 자신들의 손을 하나님을 향해 뻗었다(참조 출 9:29, 33; 17:11; 왕상 8:22; 스 9:5; 욥 11:13; 시 88:9; 143:6).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시 66:18; 약 4:3과 비교해 보라.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신실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마 6:5; 눅 18:14). 기도를 길게 혹은 자주 드릴 수는 있지만 그것이 중언부언이 되어서는 안 된다(마 6:7). 그 손이 피로 얼룩져 있거나 악한 길을 계속 고집하는 악인들의 기도는 은혜의 보좌에 상달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의 시대에 히브리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기도를 열심히 하는 매우 신실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버리는 일은 거부하였다. 그들의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닌 입술에서만 나오는 기도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 같은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피가 가득함이니라: 근자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 1QIsa(참조 제1권, 32; 이사야 서론)에는 이 구절 뒤에 “그리고 너희의 손가락에는 죄악이 가득하니라”라는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이 부분은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고”를 첫 행으로 하는 2행 연구(聯句)가 된다.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죄는 도덕적 부패와 영적 타락의 결과를 초래한다. 다윗은 범죄 후에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죄로 오염되었음을 깨닫고 자신에게 정한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10절).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죄인은 누구든지 도덕적 정결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그의 마음이 깨끗해져야만 한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악한 마음을 씻을 것(렘 4:14)과 죄악에 젖은 손을 깨끗이 할 것(약 4:8)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마음에 당신의 율법을 쓰시고(렘 31:33) 사람을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요일 1:9)이라고 약속하신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요구하였는데, 이는 부정한 자들이 더 이상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사 52:1). 요한은 속된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한 성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계 21:27).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마음에 심어주고자 애썼던 교훈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는 그의 백성이 거룩하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이었다.

악행을 그치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죄를 그치라고 요구하셨다. 그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도 거룩해야만 하였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악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하늘의 순결한 환경 속에는 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리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의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

17 선행을 배우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암 5:15)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소극적인 선 곧 악행을 삼가는 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경건은 능동적 원칙이며 의의 수련은 죄악을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사람이 이전에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었든 관계없이 그는 이제 악을 그칠 뿐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위한 신실한 노력까지도 기울이고자 의도할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게 스스로의 단호한 결심과 더불어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성품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서히 그러나 근면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부지런한 연구와 불굴의 인내 그리고 결심과 연습을 통해서 그들은 때가 이르면 바른 삶의 습관을 습득할 수 있다. 지금 잘 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잘 하는 법을 배우는 점진적이고 근면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다. 누구라도 바른 삶이 그의 습관이 되기까지는 잘 행하는 법을 다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압제를 해결하며” 또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며”가 더 바람직한 번역이다. 이스라엘에 사는 많은 사람이 그들의 동족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바로 잡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의무였다. 압제하는 자들은 더 이상 압제를 못하게 제지되어야 했으며, 압제당하는 자들은 그 압제에서 구원받아야만 하였다.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정의를 사랑하는 자들은 고아들을 옹호하고 그들에게 공의가 시행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 곧 불행과 압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지도자들은 이런 불행한 부류의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하나님이 이 같은 상황을 바로 잡도록 요구하셨다. 참된 사랑과 동정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모든 사람을 위해 공의를 세우는 노력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종교, 또한 사람들을 하늘 왕국의 원칙에 조화된 삶으로 이끌지 않는 종교는 종교로서 가치를 상실한 종교이다. 종교가 엄숙한 의식들만 준수하고 고아들과 과부들의 필요에는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의 의미 자체를 상실한 것이다. 추가적인 설명을 보려면 약 1:27 주석을 참조하라.

 

202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