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사람은 하나님이 아님
장지원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¹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²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³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⁴
너는 하늘을 우러러⁵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⁶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⁷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⁸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⁹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¹⁰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11 상동>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¹¹
응락하는¹² 자가 없음은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 하심이라
하물며¹³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시비는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하는 너랴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¹⁴
횡포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이제 너 욥이 헛되이¹⁵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노트> 구약성서 욥기35장은, 엘리후는 공의의 속성에 대한 욥의 견해와 법적 탄원을 요구하는 욥의 태도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다. 엘리후의 주장은, 인간은 그 어던 행실로도 하나님의 사역에는 조금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엘리후는 삼단 논법을 사용하여,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기 때문에, 욥이 자기가 당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아무리 호소하고 자기의 의를 고집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강변한다.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¹: 참조 32:2 주석. 엘리후에 관한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그는 이 책 앞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그가 말한 다음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가계(家系)에 관해서는 이 책에 언급된 다른 어떤 사람에 관한 것보다 더 상세한 정보가 주어졌다.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참조 삼상 1:1; 대상 12:20; 26:7; 27:18)라는 뜻을 지닌 아주 평범한 히브리 이름이다. 그의 부친의 이름인 “바라겔”은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라는 뜻이다. “부스 사람”은 엘리후가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가문임을 확인해 준다(창 22:20, 21. 참조 창 11:29). 어떤 이들은 “람”을 룻 4:19과 마 1:3, 4에 언급된 다윗의 조상 람과 동일 인물로 본다. 다른 이들은 그가 창 22:21에 언급된 나홀의 족속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엘리후가 길게 말하는 동기는 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함이다. 그는 욥의 과거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자로서 한 가지 주제를 옹호하고자 하는데, 그의 명제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이다.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²: 욥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적은 있지만(9:22~24; 10:3; 12:6), 여기에 표현된 엘리후의 비난은 욥이 자신의 발언에서 의도했던 범위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포함하고 있다.
유익이 무엇인고³: 엘리후는 욥이 의인도 죄인처럼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견해는 세 친구들뿐 아니라 엘리후에게도 거슬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욥의 진술에서 부당한 추론을 이끌어 낸다. 욥은 의인들이 궁극적으로 악인들보다 유리한 점을 갖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뜻은 언제나 인간의 특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내가…대답하리라⁴: 엘리후의 대답은 22:2, 3에 나오는 엘리바스의 주장을 부연한다.
(동무들: 히브리어 르임(re‘im). 2:11; 19:21; 42:7에서는 “친구”로 번역되었다. 욥의 세 친구를 가리킨다.)
하늘을 우러러⁵: 엘리후가 이 말을 하는 목적은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받으실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하늘과 구름의 높고 웅장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⁶: 그의 주장은, 하늘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영향을 받거나 미동(微動)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의 권세는 쇠하지 않는다. 그분은 상해받지 않으시며, 당신의 위엄에 손상을 받지도 않으신다.
네가…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⁷: 반대로 엘리후는 사람의 의가 하나님을 유익하게 하거나, 사람에게 대한 의무를 하나님께 지우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⁸: 엘리후의 이론에 따르면 죄나 의의 결과는 하나님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당한다. 하나님은 죄나 의의 영향에서 멀리 떠나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엄밀한 공의에서 벗어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상을 꼭 받아야 할 사람은 상을 받고, 벌을 꼭 받아야 할 사람은 벌을 받는 일이 따르게 된다. 그 결과, 의롭게 살면 유리한 점이 있다. 엘리후의 판단에 따르면 하나님은 너무 높은 곳에 계시기 때문에, 의인에게는 상을 주어야 하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어야 하는 인과율(因果律)의 작용을 수정할 수 없으시다. 달리 말해서, 사람의 악함이나 의로움은 하나님께는 상관없이,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친다. 이 점에서 엘리후의 철학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 사이의 밀접한 유대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초월성은 알고 있지만, 그분이 당신의 피조물에게 가까이 계심을 알지 못한다. 복음은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데, 그분은 당신의 피조물이 행하는 일에 영향을 받으시며 그들과 개인적으로 관계하신다(참조 히 4:15).
학대가 많으므로⁹: 엘리후는 학대라는 엄연한 사실에 직면하고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저들보다 더 강한 자들에게 받고 있는 처우로 인하여 울부짖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자기 철학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왜 이렇게 학대받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가?
10~11¹⁰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짐승이나 새는 고통과 괴로움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울부짖긴 하지만, 저들의 창조주에게 호소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원망 이외의 할 일을 가르쳐 주셨는데, 사람은 믿음과 경건과 겸손과 복종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슬픔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 엘리후의 철학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러한 호소에 응답하지 않으실 경우, 그것은 틀림없이 올바른 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엘리후의 주장은, 학대받는 자들이 계속하여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그들이 저희 괴로움을 원망하긴 하지만 합당한 정신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간다면, 그분은 그들에게 “밤에 [한 나의] 노래”를 주실 것이며, 어둠과 괴로움의 시간에 즐거움을 주실 것이다(참조 시 30:5; 77:6; 90:14; 143:8). 이런 주장의 결점이라면,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로 구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들이…부르짖으나¹¹: 엘리후는 분명히 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님은 진지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진지한 부르짖음은 즉각적으로 또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고통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논리적인 입장처럼 보이는 것이라도 얼마나 극도로 오도(誤導)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응낙하는¹²: 엘리후는 악인들이 하나님께 겸손하게 구하지 않고 교만하게 구하기 때문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고통에서 구제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들은 이기적 동기로 하나님께 다가간다.
하물며¹³: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할 것 같다. “네가 그분을 볼 수 없다고 말할 때는 얼마나 더 못하랴.” 이 말은, 하나님이 쓸데없는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신다면, 자기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원망하는 자의 부르짖음은 얼마나 더 듣지 않으시겠느냐는 뜻이다. 분명히 엘리후는 욥이 실망에 빠져 한 말, 곧 9:11; 13:24; 23:3, 8, 9; 30:20; 33:10 등에 나오는 진술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이…벌을 주지 아니하셨고¹⁴: 이 절의 전반부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리고 이제 그분이 그[욥]의 분노를 벌하지 아니하셨으므로”가 된다. 그 사상은 하나님이 욥의 거만한 말 때문에 새로운 고통을 주지는 않으셨다는 뜻일 것이다. 그 때문에 욥은 대담해져서 원망을 계속하게 되었다.
헛되이¹⁵: 엘리후는 욥이 원망할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욥이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고 시사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분명히 이런 말을 듣고 욥이 위로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2026.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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