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 1장 1-25절>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SDA 주석> - 역사적 배경 -
그리스도의 일생 동안 팔레스타인 지방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고, 로마는 폼페이우스(Pompey)의 지휘하에 그 지방을 정복한 뒤 BC 64~63년에는 이 지방을 로마 제국의 수리아(Syria) 도(道)에 예속시켰다. 로마군이 침입하기 전 약 80 년간 정치적인 독립을 누려온 유대인들은 외국인들의 침입과 압력 그리고 군대의 무력 밑에 있음을 적이 분개하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이 헤롯 대왕(BC 37~4)을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릴 왕으로 임명하자, 유대인들의 운명은 더욱 어둡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독립에 대한 갈망은 민족적인 염원이 되었고, 국민 생활의 모든 국면에 실질적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이 갈망은 구약의 메시야에 관한 기록들을 해석하는 일과 그날을 기대하는 모든 종교적인 사상까지 물들였다. 로마에 의한 유대의 복속(服屬)은 하나님의 요구를 불순종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1 아브라함[의 자손]: 믿음의 영웅 가운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약 2:23; 참조 대하 20:7; 사 41:8)로 불릴 만큼 특출한 존재이다. 아브라함은 신실함으로 인해(참조 갈 2:7, 9) 선택받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조상이 되었다. 바울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지상의 모든 나라가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은 명백한 메시야 예언이다(창 22:18; 참조 갈 3:16).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임을 확신시키기 위한 노력에 걸맞게, 마태는 적절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소급하고 있으며, 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한 누가는 그리스도의 조상들에 대한 기록을 전 인류의 조상으로까지 거슬러 추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그를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의 상속자로 여기는 것이 적합함을 보여 줌으로 마태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요 8:35, 39 주석을 참조하라.
마태의 족보와 누가의 족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눅 3:23 주석을 참조하라.
다윗의 자손: 이것은 통치자들(마 22:42; 막 12:35; 눅 20:41)과 평민들(마 9:27; 12:23; 15:22; 20:30, 31; 21:9; 막 10:47, 48; 눅 18:38, 39; 참조 요 7:42) 모두가 기다리는 메시야를 언급할 때 사용하던 보편적인 호칭이다. 이것을 메시야의 칭호로 사용한 점은 메시야를 다윗의 후손으로 말하는 예언에 대한 이해를 보여 준다. 로마의 속박으로 지친 백성들에게 또한 그것은 찬란했던 다윗 통치의 독립과 번영으로 그들의 왕국이 회복될 것을 암시했다. 다윗 자신도 한 아들이 자신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삼하 7:12, 13; 시 132:11)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에 의해 성취될 것으로 이해했다(행 2:29, 30; 참조 신 18:15 주석). 옛 선지자들은 메시야를 거듭해서 그렇게 언급했다(사 9:6, 7; 11:1; 렘 23:5, 6 등). 신약의 기자들은 반복해서 “다윗의 자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다(롬 1:3; 딤후 2:8 등).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는 다윗의 보좌와 다윗에게 주어진 메시야 약속의 후사가 되었다.
예수: 헬라어로는 이에수스(Ie-sous)인데, 히브리어의 예호슈아(Yehos∨ua‘) 즉 “여호수아”에 해당한다(참조 행 7:45; 히 4:8, 누가와 바울은 여호수아를 “예수”로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이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다”(참조 21절)라는 의미로 알려져 왔다. 어떤 학자들은 “여호와는 관대하다”라는 해석을 제안하기도 한다. 요수아(Joshua)의 원래 이름이었던 호세아(Oshea)가 여호수아(Jeho- shua)로 바뀌었다(참조 민 13:16 주석). 요수아는 여호수아의 축약형 이름이다.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 아람어가 히브리어를 대신하여 공용어가 되었을 때, 그 이름은 예슈아(Yes∨ua‘)가 되었으며, 그것이 헬라어 이에수스(Ie-sous)로 음역되었다.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한 이름을 택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습과 어울리게(참조 1:21 주석), 예슈아(Yes∨ua‘)라는 이름은 신약 시대에 유대인 소년들에게 주어지는 흔한 이름이었다(참조 행 13:6; 골 4:11 주석).
오늘날의 이름은 신원을 나타내는 꼬리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경 시대에는 이름이 부모의 신앙과 소망(선지자와 왕, 481), 아이의 탄생 상황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특성을 나타내거나, 특히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정하신 경우에는 그의 생애의 사명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심사숙고하여 지었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역사적 및 예언적 회상들로 가득 차 있다. 여호수아가 이 세상에 있는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것처럼, 우리 “구원의 주(Captain)”이신 예수는 우리를 위해 하늘 가나안의 문들을 열기 위해 왔다. 예수는 단지 우리의 “구원의 주”(히 2:10)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히 3:1)이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직후의 대제사장(참조 스 2:2 주석)은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슥 3:8; 6:11~15). 호세아(이 이름은 히브리어로 오셰아[Os∨ea]와 동일하다. 참조 민 13:16)가 부정한 아내를 사랑하여 한동안 그녀의 애정을 얻기 위해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노예시장에서 그녀를 되사오는 것처럼(호 1:2; 3:1, 2), 예수도 인류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하기 위해 왔다(눅 4:18; 요 8:36).
그리스도: 헬라어로 크리스토스(Christos). 이 단어는 “메시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Mas∨iah., 참조 시 2:2 주석)의 헬라어 번역으로 “기름부음받은” 혹은 “기름부음받은 자”를 뜻한다. 흔히 사복음서에 그렇게 되어 있듯이, 부활 이전의 예수는 일반적으로 바로 그 그리스도(the Christ)라고 지칭되는데 이는 이 용어가 어떤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칭호임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부활 이후에는 정관사가 일상적인 용법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는 칭호뿐만 아니라 이름이 되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출 3:30), 왕(삼하 5:3; 참조 삼상 24:6) 그리고 때때로 선지자들(왕상 19:16)은 거룩한 봉사를 위해 위임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따라서 이들은 마쉬아흐(mas∨iah.), 곧 “기름부음받은 자”였다(레 4:3; 삼상 24:6; 대상 16:21, 22). 메시야 예언에서 이 용어는 선지자로서(신 18:15), 제사장으로서(슥 6:11~14) 그리고 왕으로서(사 9:6, 7) 우리의 구속자로 임명된 분(사 61:1; 단 9:25, 26)인 바로 그 메시야에게 특정하게 적용되었다. 그는 선지자로서 사람 앞에서 아버지를 나타내기 위해 왔고, 제사장으로서 아버지 앞에서 사람을 대표하기 위해 올라갔으며, 왕으로서 그를 믿는 자들을 이 세상의 죄의 세력뿐 아니라 죄의 왕국으로부터 해방하고, 영광의 왕국에서 그들을 영원히 통치한다.
크리스토스(Christos)는 “문지르다”, “마사지하다”, “기름 붓다”를 뜻하는 동사 크리오(chrio-)에서 왔다. 신약은 그리스도가 “기름부음받았”다고 말한다(눅 4:18; 행 4:27; 10:38; 히 1:9).
마 1:18; 16:20; 막 1:1 등에 나타난 대로,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두 이름을 함께 사용한 것은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과, 마리아의 아들이요 사람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가 진실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의 고백을 나타낸다. 요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마 1:23; 요 1:1~3, 14; 빌 2:6~8; 골 2:9 주석을 참조하라.
세계: [예수의 족보, 마 1:1~17=눅 3:23하단~38. 주요 주석: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이것은 1~17절에 나타난 예수의 족보에 대해 마태가 택한 제목이며, “계보”, “족보”, “탄생에 관한 기록 책”, “가계”(家系) 또는 “출생 기록부”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또한 2:1의 첫 구절은, 마태가 이 제목을 택한 것은 예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의 상황 설명을 의도적으로 넣으려 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참조 1:18~25).
마태는 주로 유대인 독자를 고려한 예수의 생애를 기술할 때, 전형적인 유대인의 방식에 따라 예수의 가계도를 제시함으로 시작한다. 메시야의 도래가 예언된 사건이기 때문에 그는 나사렛 예수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증거한 바로 그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메시야는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창 22:18; 갈 3:16), 왕족의 기초자인 다윗의 후손이 될 것이었으므로(사 9:6, 7; 11:1; 행 2:29, 30), 마태는 예수가 이 두 출중한 인물의 후손으로서 자격을 갖추었음을 제시한다. 이러한 증거가 없었다면, 자신이 메시야라는 예수의 주장은 무효가 되었을 것이며, 그 외의 주장들도 더 이상 검토해 보지도 않고 폐기되었을지 모른다(참조 스 2:62; 느 7:64).
마태가 이것을 기록할 당시에, 예수의 족보를 접할 수 있는 모든 공적인 기록들과 비교하여 검증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의 대부분(2~12절)은 구약의 족보들(왕상 1:34; 2:1~15; 3:5, 10~19)과 대조하여 점검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마태와 동시대에 살았던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기독교 신앙을 공공연히 반대하던 원수들까지도 이 가계도의 확실성에 대해 도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이 족보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히브리어 이름들을 헬라어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변화와 몇몇 의도적인 생략(참조 8, 11, 17절 주석)을 제외하고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스룹바벨에 이르는 마태의 족보는 구약에 나타난 유사한 족보들과 일치한다(참조 대상 1:28, 34; 2:1, 4, 5, 9~12, 15; 2:15~19; 룻 4:18~22). 스룹바벨에서 그리스도에 이르는 구, 신약 중간 시대의 이름들은 비교해 볼 만한 기록들이 없다.
유다: 창 29:35 주석을 참조하라. 바울은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히 7:14).
그의 형제: 마태가 여기서 야곱의 다른 아들들을 언급한 것은 아마도 다른 지파에 속한 유대인들에게 유다 지파의 예수가 그들에게 역시 구주가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3 다말: 히브리인의 족보에서 여성의 이름을 발견한다는 것은 관습에 벗어난 예외에 속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마태가 그들을 족보의 고리로 특별히 언급한 것이라기보다는 부수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사라와 라헬같이 존경받는여성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사실은, 여기에 언급된 네 명의 여성들이 아마도 그들 각자가 갖는 특별한 환경 때문에 포함되었음을 암시한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이 네 명 모두 이방인 출신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배타성에 대한 책망을 암시하며, 예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속한다는 사실에 대한 무언의 인정이다.
룻을 제외한 이 여성들의 이름에는 부끄러운 사건들이 연루돼 있다. 단순히 인간적인 역사라면 메시야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들의 이름을 침묵으로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태는 특별히 그의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했던,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참조 9:13)는 말씀을 인용한다. 자신 역시 세리였기 때문에 때때로 창기같이 취급되었던 그는(참조 21:31, 32) 마음속 한편에 완전히 버림받아 존귀함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배려가 있는 듯하다.
베레스와 세라: 이들은 다말에게서 태어난 유다의 아들들이다(참조 창 38:6~30 주석). 다말은 가나안 족속인 듯하며 유다의 며느리였다.
5 살몬: 참조 룻 4:20; 대상 2:11. 살몬은 갈렙과 에브랏(대상 2:9~11, 19, 24), 그리고 베들레헴(그의 아버지는 또 다른 이름 “살마”[Salma]로 나타나 있다. 참조 대상 2:50, 51, 54)의 가까운 친족이었으며, 따라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진 족속과 근친이다(참조 창 35:19 주석; 대상 2:24, 51, 모팻역; 미 5:2). 어떤 주석가들은, 살몬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보냈던 정탐꾼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여리고의 라합과 살몬의 아내 라합이 동일인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들이 있는데 이는 마태의 족보에 나타난 살몬과 다윗 사이의 세대수가 여리고의 라합과 다윗 사이의 시간적인 간격을 메우기에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 견해가 반드시 타당하다고 보기 어려운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마태는 다른 절에서 예수의 조상 가운데 어떤 이들을 의도적으로 빠뜨리고 있으며(참조 8, 11, 17절 주석), 룻기의 저자를 따라 여기서도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2) 라합은 결혼할 때 아마도 젊었을 것이고(참조 수 6:23), 보아스는 룻과 결혼할 당시 젊은이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며(룻 3:10), 다윗이 태어났을 때 이새는 이미 나이가 많았다(삼상 17:12~14).
라합: 참조 룻 1:1; 2:1 주석. 이 사람이 여리고성을 함락하기 전에 그곳에 보내진 히브리인 정탐꾼들을 보호해 준 여리고성의 기생이며 가나안 여인 라합임을 의심할 만한 증거가 거의 없다(참조 수 2; 6:23 주석). 그녀는 성경에서 이 이름으로 언급된 유일한 사람이며, 마태가 사용한 헬라어 라캅(Rhachab)은 히브리어 라합(Rah.ab)의 정확한 음역이다. 그러나 히 11:31과 약 2:25에는 그 이름이 라압(Raab)이라고 되어 있다(헬라어 성경에는 철자가 다르게 되어 있지만 개역한글판에는 모두 라합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시 87:4; 89:10; 사 51:9 에 나오는 “라합”[Rahab]은 히브리어의 라합[rah.ab]에서 왔으며 애굽에 대한 상징적인 이름이다). 또한 여성들의 이름을 족보에 올리지 않는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라합의 이름을 언급한 사실은, 마태가 그녀를 포함시킨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어쨌든 수 2장의 라합은 믿음의 영웅들의 전당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히 11:31),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증으로 그녀를 언급한다(약 2:25).
룻: 나오미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때 그녀와 동행했던 모압 여인(참조 룻 4:18~22; 대상 2:3~15). 역사상 그 무엇도 나오미에 대한 그녀의 아름다운 헌신(룻 1:16)과 다소곳한 매력을 능가할 수 없다.
6 다윗왕: 히브리 군주정치 아래서도 이스라엘 정부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신정체제였다(시대의 소망, 737, 738,). 최고의 통치자로서 하나님은 그의 대사들인 선지자들을 통해 국가적 정책을 지도하고자 하셨다. 다윗은 신성한 지도권에 순종하였으며 여호와 앞에서 진정한 겸손의 정신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악한 길에 들어선 일로 견책을 받았을 때 그는 진정한 회개의 정신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허물을 인정했고, 용서를 구했으며,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고자 새롭게 출발했다(삼하 12:1~13; 24:10, 17; 시 51:4, 10, 11 등). 하나님이 다윗을 높이고 번영하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통회하는 마음 때문이었다(참조 왕상 3:6; 8:25; 사 57:15; 미 6:8).
솔로몬: 다윗이 진지하게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후에, 밧세바를 통해 태어난 두 번째 아들(삼하 12:13~24; 왕상 1:11~40).
8 여호사밧(Josaphat): 왕상 22:41~43에는 “Jehoshaphat”으로 되어 있다. 이름의 철자가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은 성경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족보에 나타난 철자의 차이는 헬라어로 기록된 마태의 책에 있는 이름들의 대부분이 70인역에 나타나 있는 대로 쓰였기 때문이다. 제임스왕역(KJV) 번역자들은 헬라어 이름들이 음역된 본래 히브리어 이름을 찾아가지 않고 단순히 헬라어 이름들을 음역했다. 때때로 인물들이 다른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여호야긴(왕하 24:6)은 헬라어 본문에 기초하여 여고냐(Joconiah, 대상 3:16) 또는 여고냐스(Jechonias, 11, 개역한글판에는 그냥 “여고냐”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여기서 마태는 요람(여호람)과 웃시야(아사랴; 참조 대상 3:11, 12) 사이에 있던 유다의 연속적인 세 왕,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의 이름을 생략했다. 이 생략을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것은, 구약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왕들의 족보는 상식에 속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필사자들의 실수일 가능성도 없다(참조 1:17 주석). 솔로몬으로부터 여호야긴에 이르는 19개의 이름 수를 줄여서 아브라함부터 다윗에 이르는 14개(17절)의 이름 수와 일치시키는 것이 마태의 목적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또한 마태는 이 세 명이 예수의 족보에 자리를 차지할 가치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자 요람의 아내였던 아달랴(대하 22~25장)를 바로 뒤이어 계승한 왕들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북방 왕국에 바알 숭배를 도입한 것처럼(참조 왕상 16:31, 32), 남방왕국에 바알 숭배를 시작하게 한 사람이 바로 아달랴였다(참조 왕하 11:18 주석).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는 적어도 통치 후기에는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하 22:3, 4; 24:17, 18; 25:14).
9 아하스: 참조 왕하 16장.
히스기야: 참조 왕하 18~20장. 유다의 선한 왕 가운데 한 명.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낫세는 비록 악한 길에서 회개하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폭정을 하여 아버지의 개혁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10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므낫세(왕하 21:1~18)와 아몬(왕하 21:19~26)의 악한 통치에 이어, 히스기야의 손자이며 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인 요시야(왕하 22:1~23:28)가 왕위에 올랐다. 345년 넘게 남방 왕국을 다스린 20명의 통치자들 가운데 소수만이 하나님을 섬겼다. 이와는 현저히 다르게, 10왕조를 대표하는 20명의 왕이 209년 이상 북방 왕국을 통치했으나 여호와께 충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이렇게 하여 마태가 기록한 예수의 족보의 두 번째 구분이 끝났다(참조 17절 주석). 이 기간은 다윗과 솔로몬 통치하의 황금 시대로 시작하여 그것의 해체 및 유다 역사의 암흑 시대인 바벨론 포로에 이르는 군주정치 시대를 포함한다.
누가는 마태가 기록한 것보다 여섯 명 더 많은 혈통적 연결고리를 다윗과 스알디엘 사이에 둔다(참조 눅 3:27~31). 마태가 생략한 네 이름을 고려한다 해도(8절과 “여고냐” 항목의 주석을 참조하라) 이것은 단지 두 개의 차이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단순히, 누가가 따른 족보가, 마태가 따른 왕들의 계보보다 두 세대를 더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차이는 500년의 기간 동안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윗과 예수 사이에 있는 약 1,000년의 기간 안에, 누가는 마태보다 15세대를 더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태가 더 많은 부분을 생략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여고냐: 마태의 명부에서 두 번째 확실한 생략이 여기서 나타난다(참조 8절 주석). 여고냐(여호야긴, 왕하 24:6; 여고냐, 대상 3:16; 또는 고니야, 렘 22:24)는 실제적으로는 여호야김의 아들이며, 따라서 사실상 요시야의 손자이지 아들이 아니다(대상 3:15). 어떤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명부에 여호야김을 부가한 것은 17절에 언급된 세대들에 더욱 명확한 대칭적 구별을 이루기 위함이며(참조 17절 주석), 마태가 원래 여호야김의 이름을 족보에 포함시켰으나 여호야긴과의 유사성 때문에 후대에 잘못하여 빠뜨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요시야와 여고냐 사이에 여호야김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는 몇 가지 본문상의 증거들이 있다.
그의 형제: 만약 여호야김이 포함된다면(위에서 설명된 “여고냐” 항목의 주석을 참조하라), 이 “형제”는 한 핏줄의 형제들인 여호아하스와 히스기야를 가리킬 것이다(참조 대상 3:15 주석).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형제”라는 표현은 넓은 의미로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요시야의 세 아들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히스기야는 유다의 보좌에서 통치했지만, 그중 하나는 실제로 여고냐의 아버지였고 다른 둘은 그의 삼촌이었다.
12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예레미야는 여고냐가 “무자”한 채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22:30). 그러나 이것은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고 곧이어서 설명한다. 스알디엘을 포함한 여고냐의 몇몇 아들들이 대상 3:17에 나타난다. 이들 중 한 명 이상이 여고냐와 함께 바벨론에 갔을 가능성이 있다(참조 렘 22:28 주석). 여고냐는 포로로 잡혀 갈 때 약관 18세였다(참조 왕하 24:8). 그로부터 37년 후 느부갓네살이 죽었을 때, 그는 감옥에서 풀려났고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왕하 25:29) 되었으며, 왕실로부터 정규적으로 수당을 받으면서 남은 생애 동안 왕의 은혜를 누린 것이 분명하다(참조 왕하 25:27~29 주석).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참조 눅 3:27 주석. 70년 포로 생활의 끝을 가져온 고레스의 조서에 따라, 스룹바벨은 약 50,000명의 유대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참조 스 2:2 주석.
15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아비훗으로부터 맛단에 이르는 여덟 사람(13~15절)에 대하여는 이름 이외에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다른 곳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 여덟 세대는 5세기에 걸쳐 있다. 마태는 그의 족보의 세 번째 부분을 처음의 두 부분들과 일치시키기 위해 몇몇 이름들을 생략했을 수도 있다(참조 스 7:5; 마 1:17주석). (1) 기록된 세대의 수가 시간의 길이와 일치한다고 보기가 어렵고, (2) 이 시기 동안 누가는 마태보다 아홉 세대를 더 기록하고 있으며, (3) 마태가 족보의 두 번째 부분에서 네 이름을 생략했다는 사실 등이 이러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마태복음의 맛단과 누가복음의 맛닷(3:24)이라는 이름은 모두 마태(복음서 기자가 아닌)의 다른 형태이며, 따라서 “맛단”(Matthan)과 “맛닷”(Matthat)은 실제로 한 사람이며 동일인이라는 제안이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곱과 헬리(눅 3:23)는 형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헬리는 남자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조카인 요셉을 자신의 적법한 아들이요 상속자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참조 눅 3:27 주석). 이 제안의 목적은, 마태복음에 야곱의 아들로 되어 있는 요셉과 누가복음에 “헬리의 아들”(3:23)로 나와 있는 요셉을 조화시키려는 데 있다. 또 다른 이론은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 신 25:5~10)에 따라 야곱이 아들 없이 죽은 그의 형제 헬리의 부인과 결혼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결합으로 태어난 첫 번째 아들 요셉은 실제적으로 야곱의 아들이었으나 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자 상속자가 되는 셈이다. 초기교회 교부들이 개진한 이 두 가지 의견들은 모두 추측에 근거한 것이며, 따라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알기 원하면 눅 3:23 주석을 참조하라.
16 마리아: 70인역에는 마리암(Mariam)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미리암(Miryam)에서 왔다. 요셉과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다윗 가문에 속했는데(시대의 소망, 44; 참조 행 2:30; 13:23; 롬 1:3; 딤후 2:8), 그것은 예수가 문자 그대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롬 1:3; 참조 시 132:11)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친족”(눅 1:36)이 “아론의 자손”(눅 1:5)이라는 사실이, 마리아도 반드시 유다 족속이 아니라 레위 족속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친족”이라고 번역된 단어에 관해서는 눅 1:36 주석을 참조하라.
마리아는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낸 듯하다(눅 1:26). 그녀에게는 친척으로 사가랴의 아내인 엘리사벳이 있었다(눅 1:36). 또한 나사렛 근처 마을이었던 가나에도 친척들이 있었다(참조 요 2:1, 5; 시대의 소망, 144, 146,). 그녀의 어머니 이름이 안나(Anna)였다는 것은 전적으로 전승에 의한 것이다. 그녀는 여호와께 크게 은혜를 받은 자요 여자 중에 복된 자였다(눅 1:28, 42). 여자의 “후손”(창 3:15; 계 12:5)으로 올 것이라는 구주에 대한 소식이 처음 선포될 때부터,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그들의 맏아들이 약속된 메시야이기를 간절히 기다려왔다(시대의 소망, 31). 마리아에게 이 크고 유일무이한 영광이 주어졌다.
마리아가 선택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기약된 시기(단 9:24~27; 막 1:15; 갈 4:4)에 그녀의 성품이 다윗 가문의 다른 어떤 여인들보다도 거룩한 어머니의 이상을 나타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막 15:43; 눅 2:25, 38; 참조 히 9:28) 선택된 소수 중 하나였다. 바로 이 소망이 그녀의 생애를 성결하게 하고(참조 요일 3:3) 그녀에게 주어진 신성한 역할을 위한 자격(부조와 선지자, 308; 선지자와 왕, 245; 시대의 소망, 69)을 갖추게 했다. 현대 이스라엘의 모든 어머니들도 마리아처럼 하늘과 협력할 수 있으며(시대의 소망, 512),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자녀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들 수 있다. 참조 눅 2:52 주석.
남편 요셉: 마태는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 마태는 요셉이 예수와 관계가 있지만 그것은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남편으로서의 관계라고 말한다.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각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주된 연결 고리로 사용한 “낳고”라는 말을 생략한다.
마리아에게서: 이 표현은 요셉이 예수의 생부가 아니고, 마리아와의 결혼을 통해 예수의 법적인 아버지가 되었음을 나타낸다(참조 13:55).
17 모든 대수: 완전한 족보를 제공하는 것이 마태의 의도였다면 포함했을 이름들을 적어도 네 개나 생략했다는 사실은 기록에서 명백해진다(참조 8, 11절 주석). 구, 신약 중간 시대에 해당하는 또 다른 이름들을 생략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아브라함에서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누가는 56명을 거명했으나 마태는 41명밖에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가 사용한 “모든 대수”는 그가 기록했던 사람들만을 의미할 뿐 그동안 실제로 살았고 전체 족보에 기록될 그리스도의 모든 조상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마태의 족보에 나타난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분의 이름들의 세대수는 첫 번째 부분과 일치시키기 위해 조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태는 수적으로 대칭을 이룬 축약된 명부를, 기억을 돕기 위한 기법으로 채용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축약된 명부들은, 예컨대 구약의 에스라 같은 책에서 발견된다(참조 스 7:1, 5 주석). 그러나 이 축약된 족보는, 다른 사람들이 조상에 대해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어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에도 에스라가 아론의 후손임을 밝히는 충분한 증거로 여겨졌다(스 2:62; 느 7:64). 예수와 실제적으로 동시대에 살았던 유대인 철학자 필로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들의 혈통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긴 축약된 족보를 제시했다. 아랍인은 오늘날에도 단순히 자신의 혈통을 확증하는 것이 목적일 때는, 조상들의 완벽한 명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 중 출중한 몇 사람의 이름만을 언급하는 것이 상례다.
마태가 그의 족보에서 사용한 삼중 구분은 역사적으로도 올바른 것인데, 각 부분은 유대 역사에서 뚜렷한 시기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부분인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기간동안 히브리인들은 근본적으로 족장체제하에 있었으며, 두 번째 시기는 군주체제였고, 세 번째는 유대인들이 여러 외세의 통치 아래에 있었던 시기다.
그리스도까지: 참조 1절 주석. 마태는 그리스도를 역사적 관점에서 예언된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다.
열네 대: 각기 14대로 구성된 세 부분은 마태가 수록한 41명이 아닌 총 42명이 되어야 한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되어 왔다. 어떤 이들은 여고냐의 이름은 두 번째 부분의 마지막 이름과 세 번째 부분의 첫 이름으로 두 번 계산돼야 한다고 제안한다. 다른 이들은 마태가 원래는 요시야와 여고냐 사이에 여호야김의 이름을 수록했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참조 11절 주석).
18 나심: [요셉에게 알림; 그의 결혼, 1:18~25. 참조 예수의 생애와 봉사, 지도 1]. 아마도 마태가 예수의 탄생을 둘러싼 주변 상황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예수의 오심이 구약에 나타난 예언들의 한 성취임을 증거하는 데 필요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참조 22절). 마가와 누가와는 달리,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인간적인 흥미거리를 많이 생략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인 듯하다.
그 모친 마리아: 예수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롬 8:3). 마리아도 아담의 다른 모든 자손들과 같이 그녀의 죄로부터 구원이 필요했다(롬 3:10, 23).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다(딤전 2:5).
요셉과 정혼하고: 요셉과 약혼했다는 의미. 마리아와 요셉은 모두 다윗의 후손들로서 베들레헴을 본적지로 생각하고 있었지만(시대의 소망, 66), 자신들의 “본 동네”(눅 2:39)인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다(눅 1:26, 27; 2:4). 그들이 베들레헴에서 거처를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은 당시에 그곳에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요셉과 마리아는 모두 다윗 가문의 후손들이었다(참조 마 1:16, 20; 눅 1:26, 27; 2:4 주석). 그들은 아마도 열심히 예언을 연구하고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던 작은 무리의 일원이었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44, 47, 47, 98). 그렇다면, 그들은 때가 가까웠음을 알고 있었고, 틀림없이 이 무리에 속한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메시야의 오심을 촉진시켜 주기를 기도했을 것이다(참조 눅 2:25, 26, 38).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할 당시 홀아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적어도 여섯 명의 아이들이 있었으며(마 12:46; 13:55, 56; 막 6:3; 시대의 소망, 90, 321,; 네 명의 형제들과 수가 알려지지 않은 자매들이 언급돼 있음), 모두가 예수보다 나이가 많았던 것 같다(시대의 소망, 86, 87,). 참조 1:25 주석.
동거하기 전에: 마태는 이미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지적했다(16절). 여기서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확인한다. 정혼한 기간에 예비 신랑 신부는 비록 함께 살지는 않지만 법적으로 남편과 아내로 결연돼 있었다(신 22:23, 24). 정혼은 오직 합법적인 수단 즉 이혼을 통해서만 파괴될 수 있는 법적인 관계이며 엄숙한 언약이었다(참조 Mishnah, Git.t.in 8. 9, Soncino ed. of the Talmud, 389; K.iddushin 3:7, 8, Soncino ed. of the Talmud, 318, 320).
성령(Holy Ghost): “Holy Spirit”이 더 낫다. “Ghost”라는 말은 앵글로색슨 계통의 옛 단어에서 왔다. “Holy Ghost”와 “Holy Spirit”(눅 11:13 등)으로 번역된 표현들은 헬라어로는 동일한 단어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힘과 생명력이 발휘되는 매개자(媒介者)이다(참조 창 1:2; 욥 33:4; 요 3:3~8; 롬 8:11 등). 예수의 탄생에서 성령의 역할을 마태보다는 누가가 좀 더 명확하게 언급한다(눅 1:35). 성령의 중개(仲介)로 “말씀이 육신이 되”(요 1:14)었으며 마리아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참조 눅 1:35 주석)로 불릴 수 있었다.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폄하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대인들은 그가 사생아라는 허구를 꾸며냈다(요 8:41; 9:29). 그러나 오늘날 가장 식견있는 유대인 학자들도 그 이야기가 전혀 근거 없는, 조작된 것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요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는 “예수가 불법적인 관계에서 태어났다는 전승은 아무런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라고 말한다(Jesus of Nazareth, 36).
예수의 성육신은 숭고하고 측량할 수 없는 기적이다. 그는 모든 천상의 존재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며 우주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본체”(요 1:2; 빌 2:6)였다. 그러나 영광의 왕이었던 그는 “왕의 홀을 아버지의 손에 돌려 드”리기로 결정하고(시대의 소망, 22), “사람들과 같이” 됨으로써(빌 2:7) “잠간 동안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히 2:7, 8)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금 “모든 권세”를 되돌려 받았고(28:18)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며 보좌에 오르셨”으며(사도행적, 38),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히 2:7; 참조 사 52:13~15). 그러나 성육신의 신비는 그것이 있게 한 겸비한 사랑의 신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요 3:16; 롬 5:8; 갈 2:20; 요일 4:9). “경건의 비밀”은 모든 시대에 걸쳐 장엄한 신비다(딤전 3:16). 요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참조 눅 1:26~38 주석. 천사는 마리아가 약혼한 후(눅 1:26, 27), 그러나 잉태하기 전에 그녀에게 나타났다(눅 1:31,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요셉은 나중까지도 전혀 알지 못한 것 같다.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난 것은 마리아가 “잉태된 것”을 요셉이 이미 알고 난 후였다(1:18, 20).
19 의로운: 헬라어로 디카이오스(dikaios). 규칙과 관습을 준수하는 정확한 사람 혹은 정의를 따라 사는 의로운 사람을 일컫는 말. 신약에서 디카이오스는 넓은 의미로, 거룩한 표준에 일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가랴와 엘리사벳(눅 1:5, 6), 시므온(눅 2:25)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눅 23:50)은 모두 디카이오스라는 단어로 묘사되었다. 빌라도의 부인도 예수를 “옳은 사람”(마 27:19), 즉 디카이오스라고 언급했다. 유대인의 관점으로 볼 때 “의로운 사람”이란 모세의 율법과 랍비들의 유전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요셉은 간음한 것으로 보이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 고민했을 것이다.
드러내지: 요셉이 마리아를 공개적인 재판에서 받을 당혹감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사실은 그녀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신의 결백에 대한 증거이다.
아니하고: 요셉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정의감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마리아에게 더 이상의 수치와 고통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마리아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요셉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는 “끊는” 이유를 언급하지 않고 단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만 해도 법적으로 그녀와 끊을 수 있었다(마 19:3, 8; 막 10:4).
끊고자 하여: “이혼하고자 하여”(개정표준역(RSV)). 정혼할 때부터 양쪽은 상호 법적으로 결합돼 있기 때문에 오직 이혼을 통해서만 결별이 가능했을 것이다(참조 1:18; 5:27 주석).
20 사자: 이 천사는 아마도 사가랴(눅 1:11, 19)와 마리아(참조 눅 1:19 주석)에게 이미 나타났던 가브리엘일 것이다.
현몽하여: 누가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꿈이나 이상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났다고 암시한다(눅 1:26~38). 천사가 “그녀에게 들어”갔다(눅 1:28). 그러나 천사는 이 문제를 어찌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요셉의 꿈에 나타났다.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꿈들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 그분이 정한 방법 중 하나이다(민 12:6; 욜 2:28; 참조 창 20:3; 31:11, 24; 41:1 등).
다윗의 자손: 물론 요셉은 자신이 왕가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다. 마태의 족보가 암시하는 대로라면 그는 어쩌면 다윗 왕위의 직접적인 계승자일 수도 있다.
아내: 헬라어로 귀네(gune-). (1) 일반적인 의미의 여자(9:20; 13:33 등), (2) 아내(14:3; 18:25), (3) 약혼녀(창 29:21, 70인역; 신 22:23, 24, 70인역; 참조 계 21:9). 여기서는 명확하게 세 번째 의미로 쓰였다.
무서워 말라: 요셉은 주저하거나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해서는 안 되었다. “의로운 사람”(19절)으로서 요셉은 마리아를 취함으로 의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행동을 요구했다.
21 낳으리니: 천사는 요한의 탄생에 대해 사가랴에게 말했을 때와는 달리(눅 1:13), 요셉에게 그의 “아내”가 그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야 했다(눅 1:35). 그러나 예수가 탄생한 순간부터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아버지와의 교제, 그의 지도 그리고 보호를 통해 유익을 얻어야 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요셉은 그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특권을 가졌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가진 큰 권리로 간주되었다(참조 눅 1:59~63). 마리아 역시 예수의 이름을 짓는 데 참여했다(눅 1:31). 유대의 어린이들은 태어난 지 1주일 후인 제8일에 할례 의식을 행할 때 공식적으로 이름을 부여받는다(눅 2:21).
예수: 참조 1절 주석.
그가…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다”라는 의미가 있다(참조 1절 주석). “그”라고 번역된 단어는 강조형으로, 마치 천사가 “구원할 자가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강조한다.
태고로부터 “내가 왔노라”(Lo, I come)는 언약이 메아리쳐 내려왔다(시 40:7; 슥 2:10; 히 10:7). 수백 년 동안 그분의 백성인 히브리 민족은 그들의 구원자를 간절히 기다려왔다. 이제 “때가 차매”(갈 4:4) 운명을 지배하는 손가락이 이러한 기대를 성취시킬 한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희 죄에서: 죄는 인간을 죄의 감옥(사 42:7)에 가두어 놓았다(롬 6:16; 벧후 2:19). 그리스도는 결박을 풀고 옥문을 열어 죽음의 선고에서 포로들을 해방하기 위해 오셨다(사 61:1; 롬 7:24, 25; 히 2:15). 그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in) 구원해 주기 위해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죄 자체로부터(from)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실제로 우리가 범한 죄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로 이끄는 잠재적인 성향으로부터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롬 7:23~25; 요일 1:7, 9). 그는 악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유전적 및 후천적 성향을 포함한 “모든 불법”(딛 2:14)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오셨다(시대의 소망, 671).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바라던 대로 당신의 백성을 로마의 권세에서가 아니라, 훨씬 더 무서운 원수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행 1:6)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오셨다(눅 17:20, 21). 그리스도는 많은 사회복음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난과 사회적 부조리가 아닌(눅 12:13~15), 그것들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이유인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예수의 생애와 봉사에 나타난 모든 중요한 국면-그의 본성, 탄생, 생애의 사건들 그리고 특별히 그의 고난과 죽음-은 옛 선지자들이 이미 모두 예언한 일들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242, 820,). 그뿐 아니라, 그의 생애의 모든 행동들은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한 계획의 성취로서 수행되었다. 그가 이 땅에 오기 전에 그 계획은 그 앞에 상세히 공개되었고, 모든 사건은 각각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147, 451,; 신 18:15; 눅 2:49 주석).
이루려 하심이니 (that it might be fulfilled): 이런 유형의 표현들이 마태복음의 특징을 이룬다(참조 2:15, 17, 23; 4:14; 8:17; 12:17; 13:35; 21:4; 26:54, 56; 27:9, 35).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구문은 목적이나 혹은 단순히 결과를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루려 하기 위해” 혹은 “결과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졌으니”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마태가 이 구문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에 각각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 성취는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는(단 4:17; 시대의 소망, 147; 참조 눅 2:49 주석) 분이 준비한 사건들과 함께, 인간이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실현되었다. 어떤 사건들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to fulfill)가 아니라 오히려 예언의 성취 안에서(in fulfillment) 일어났다. 그러므로 “이루려 하심이니”(that it might be fulfilled)라는 마태의 표현은 “이루어짐이니”(in fulfillment of)로 번역해야 더 타당하다(참조 신 18:15 주석).
23 처녀: 문자적으로는 “그 처녀”(the virgin). 직접, 간접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동정녀 탄생의 사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증거를 제공한다. (1) 두 기자 모두 예수가 성령에 의해 태어났다고 주장한다(마 1:18, 20; 눅 1:35). (2) 그들은 마리아가 요셉의 아들이 아닌(참조 마 1:21 주석) 하나님의(눅 1:35) “아들을 낳았”다고 선언한다. (3) 마리아는 예수를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했다(마 1:25). (4) 마리아는 천사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단언했다(눅 1:34). 그러므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처녀”라는 단어 자체가 아니어도 충분하게 증명될 수 있으며, 마태가 그 단어를 이 문맥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해도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마태와 누가가 하나님의 지도하에서 기록했지만, 만약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탄생을 둘러싼 신비스러운 정황들에 대해 얼마나 조롱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그 이야기를 반복함으로 그 비평가들에게 더 많은 조소거리를 제공했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715).
마태가 여기서 마리아를 순결하고 젊은 미혼 여성으로 지칭하기 위해 엄밀한 의미로 “처녀”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처녀가 잉태하여”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 당시의 지역적인 상황에만 적용될 뿐이라는 반대 주장에 대해서는 사 7:14 주석을 참조하라.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며, 이렇게 하면서 엄밀하게 “처녀”만을 뜻하는 단어 파르쎄노스(parthenos)를 사용한다. 사 7:14 문제의 전반적인 논의에 관해서는 성경 번역의 문제점들(Problems in Bible Translation)이라는 책 151~169을 참조하라.
모든 이적을 부정하는 현대의 성경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동정녀 탄생을 지성인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개념이라고 일축한다. 그들은 신약의 모든 기자 가운데 오직 마태와 누가만이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들은 최초의 복음서라고 생각하는 마가복음이나 예수의 신성을 확증하기 위해 기록된 요한복음 그리고 신약에서 최고 신학자인 바울도 그것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비평가들은, 마가는 마리아의 처녀성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요한과 바울은 그 사상이 너무나 기상천외한 것이어서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결론짓는다.
이 모든 것은 침묵으로부터 끌어낸 논증들(arguments from silence)이며, 그렇기에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마태와 누가는 마리아의 처녀성을 예수의 탄생 이야기 가운데 세부 사항의 하나로 언급하고, 마가와 요한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아예 다루지 않으며, 상세하게 다룰 만한 이유가 없다. 신성과 인성의 결합 곧 성육신을, 예수의 탄생에 함축된 위대한 핵심적 사실로 강조한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성육신이 성취된 방법인 동정녀 탄생은 더 큰 진리에 비해 부수적이다. 예수의 신성에 관한 바울의 개념은 전적으로 동정녀에게서의 탄생과 일맥상통한다(빌 2:6~8; 골 1:16; 히 1:1~9 등). 성육신, 십자가에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제외하고, 바울은 주님의 생애의 세부적인 이야기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으며 이 세 가지 사건도 단지 역사적인 사실로만 다룬다.
알렉산더, 피타고라스, 플라톤, 가이사 아구스도 같은 사람들이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신의 후손이라든지 동정녀에게서 탄생했기 때문이라고 이교도들이 주장했다는 사실을 비평가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은, 위조지폐와 모조품이 있다는 것이 진짜가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당성이 없는 주장일 뿐이다.
만약 이렇게 기록된 표현들이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에 관련된 마태와 누가의 진술을 믿지 못할 것으로 폄하시킨다면, 복음서 전체를 통해 나타난 다른 많은 기록들도 같은 이유로 폐기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인간의 사고가 성경의 신뢰성을 결정짓는 표준이라면, 성경은 더 이상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단지 인간의 기록일 뿐이다.
전체적인 구원의 계획은 이적 즉 “비밀”(mystery)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롬 16:25, 26; 엡 1:9; 3:9; 골 1:27; 2:2; 계 10:7). 첫째로,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신비다(요 3:16; 롬 5:8). 무한한 지혜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고, 동시에 죄인을 율법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요 3:16; 롬 6:23) 자비와 공의가 함께 결합될 수 있는(시 85:10) 계획을 고안한 것이 또 하나의 신비다.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원수인(롬 8:7) 인간이 그분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게(롬 5:1) 된 것은 이적이다. 그리스도가 악으로 기울어진 인간을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하고(롬 7:24; 8:1, 2),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과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한 것(롬 8:3, 4) 또한 이적이다.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며(요 3:3~9), 불완전한 인간이(롬 3:23) 그리스도의 은혜로 완전한 인간으로(마 5:48) 변화되어(롬 12:2)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요일 3:1~3)도 이적이다. 인간의 생각에는 동정녀 탄생, 완전한 생애, 대속적인 죽음,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 이 모든 것들이 신비하다. 기독교는 구원의 계획의 위대한 신비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구속(救贖)하는 사랑 그 자체가 모든 신비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모든 시대의 최고의 진실, 곧 기독교 신앙의 주춧돌이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이 없다면 진정한 성육신이 있을 수 없으며,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이 없다면 성경은 단순한 우화나 전설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경건한 장난이며, 구원은 낙담시키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요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잉태하여. 누가가 증거하는 대로 성령으로 잉태하여(눅 1:35). “때가 차매”(갈 4:4)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냈고 그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했다(히 10:5).
임마누엘: 히브리어 임마누 엘(‘Immanu ’El)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하나님의 아들은 단지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 가족과 동일하게 되기 위해 오셨다(요 1:1~3, 14; 롬 8:1~4; 빌 2:6~8; 히 2:16, 17; 시대의 소망, 23; 참조 요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 14 주석). 임마누엘은 그의 개인적인 이름이 아니라 사명을 묘사하는 칭호였다(참조 사 9:6, 7; 고전 10:4).
24 데려왔으나: 참조 18, 20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요셉은 의심이나 지체 없이 실행했다. 마리아와 그녀의 아들 예수를 지키는 지상의 보호자로서 그가 적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요셉의 품성 가운데 바로 이 점에 있었을 것이다.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을 요셉은 믿음으로 행했다. 천사가 알린 그러한 사건은 인간의 역사에는 없는 일이었으나 요셉은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마 19:26; 참조 창 18:14; 욥 42:2; 렘 32:17; 슥 4:6; 눅 1:37; 롬 4:21).
요셉의 역할은 사소했지만 없어서는 안 되었다. 그가 천사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것은 마리아와 여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5 아들(제임스왕역(KJV)에는 “맏아들”(first- born son)로 되어 있음-역자 주): “첫 번째로 태어난”(firstborn)이라는 단어를 생략한 독법(讀法)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략이 예수가 마리아의 맏아들이라는 확실성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데, 이와 동일한 사본들에 눅 2:7의 진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맏”(firstborn)이라는 용어는 흔히 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애굽에 내린 열 번째 재앙에서 구원받았으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신다(출 13:2; 민 3:13). 시내산에서 레위 지파가 모든 지파들의 장자를 대신하여 성소봉사를 위해 택함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장자를 속하라고 요구했다(민 3:45, 46).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맏”이라는 말은 외아들을 가리킬 수도 있었다.
동침치 아니하더니: 헬라어 동사의 형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승인 마리아의 영원 동정설(Mary’s perpetual virginity)에 배치되는데, 이 동사의 형태가 마리아의 동정성은 오직 예수가 탄생하기 전까지만 계속되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까지”(헬라어 헤오스[heo-s])라는 단어는 영원한 동정성을 지지하는지 부정하는지 확실치 않다. 25절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는, 비록 마리아가 예수의 탄생 이전에는 아내로서 요셉과 동거하지 않았지만, 그 후에는 동거했다는 것이다. 70인역에서, 창 8:7; 삼상 15:35; 삼하 6:23; 마 5:26; 12:20; 18:30; 22:44에 나타난 헤오스의 용례를 비교하라. 예수에게는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는데, 적어도 형제들은 예수보다 나이가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요셉의 전처의 소생들이었다(참조 12:46 주석). 예수가 그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의탁했다는 사실은(요 17:27) 마리아가 낳은 다른 자녀가 없었음을 암시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돌볼 만한 위치에 있지 않거나 그녀와 예수에 대해 냉담했었을 수도 있다. 참조 1:18 주석.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이름은 난 지 8일 만에 공식적으로 주었다(눅 2:21). 그때에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등재되었다. 참조 1: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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