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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 위인전> 아하시야의 살해/장지원

노파 2025. 9. 25. 00:02

 

<성경 속에 위인전> 아하시야의 살해

장지원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동산 정자 길로 도망하니¹

예후가 쫓아가며 이르되

저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²에서 치니

저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³ 거기서 죽은지라

그 신복들이

저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⁴ 이르러

다윗 성에서 그 열조와 함께⁵ 그 묘실에 장사하니라

아합의 아들 요람의 십일 년⁶에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었더라

 

<노트> 구약성서 열왕기하 9장 27-29절에는 외삼촌 요람에게 병문안 왔던 유다 왕 아하시야가 살해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대하 22;9에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라고 되어 있다. 역대하에 기록된 ‘사마리아’라는 말은 성읍이 아니라 북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한다. 아하시야는 유다로 도망가지 못하고 북 왕국에 숨어 있다가 예후의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

아하시야가…도망하니¹: 아하시야는 요람이 죽임을 당하여 그 시체가 나봇의 포도원에 던져지는 동안 빈둥거리며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요람보다 더 빨리 추격자들에게서 도망친 것 같다.

구르 비탈²: 이블르암 근처의 비탈 혹은 언덕. 구르라는 이름은 여기서만 사용되며 정확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는다. 이블르암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 곧 이스르엘 서남쪽 약 1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추격을 받았을 때 아하시야는 예루살렘에 다다르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을 것이며, 이것이 그가 취할 수 있는 노선이다. 이스르엘에서 시작되는 길은 처음에는 에스드랠론 평원을 따라 꼬불꼬불하게 나 있지만, 얼마 후에 사마리아 산지 외곽의 돌출부에서 오르막길이 된다. 그의 추격자들이 그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하시야의 수레는 비탈 가운데 하나를 오르고 있었다. 이블르암은 현재 텔 벨 아메(Tell Bel ‘ameh)로 알려져 있다.

므깃도까지 도망하여³: 이야기의 세부 사항은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역대기의 기록에 의하면,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체포되어 예후 앞에 끌려와 살해되었기 때문이다(대하 22:9). 이 두 진술은 추가적 세부 사항을 제공하는 역대기의 기록과 연계하여, 전체적인 윤곽을 보여 주는 열왕기의 기록을 고려해 보면 조화될 수 있다. 사건들의 차례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하시야는 이블르암 근방에서 상처를 입은 후에 도주로를 바꾸어 남쪽 산악 지대 대신에 므깃도 방향의 평지를 선택했다. 므깃도에 있는 동안 남쪽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사마리아에서 붙잡혀, 먼저 도착해 있던 예후의 소환으로 므깃도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그는 처형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자세한 사항은 더 간결한 열왕기의 기사에서는 생략되었다.

예루살렘에⁴: 예후는 장례를 위해 유다 왕의 시신을 왕 자신의 수도로 옮겨오는 것을 허락했다. 유다 나라가 북쪽 이웃과 밀접하게 연합하여 교제하는 것은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다. 여호사밧은 벤하닷을 대적하는 아합을 지원한 일 때문에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았다(대하 19:2). 하사엘을 대적하는 전투에서 요람을 지원한 아하시야의 행동 또한 하나님의 눈에 괘씸한 일이었다(대하 22:4, 5). 아하시야는 자신의 목숨으로 이 같은 원조의 대가를 지불했다.

그 열조와 함께⁵: 보통 상황이라면 사악한 왕 아하시야는 다윗 성에 있는 왕들의 묘실에 장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합 가문과 관련이 있었지만 이런 영예를 그에게 준 것은 “저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었기 때문에”(대하 22:9)라는 구절에 나타난 대로 선한 왕 여호사밧의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요람의 십일 년⁶: 이 절은 아하시야의 통치 기록에 대한 후기(後記)로, 마지막 기사는 앞 절에 있다. 왕의 기록을 제시할 때 언급되는 첫 번째 항목은 그가 왕위에 오른 해인데, 그것은 이웃 나라 군주의 통치년에 비춰 환산되며, 8:25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하시야의 통치는 이스라엘의 요람의 통치 제12년에 시작되었고, 여기서는 그것이 11년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계산의 차이는, 이 기간에 유다가 북쪽 왕국과 연합하는 정책을 펴면서 유다의 체계와 1년씩 차이가 나는 이스라엘의 연대 계산 체계를 채택했다는 가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8:25의 기록은, 왕이 즉위한 해를 그의 첫 해로 부른 새로운 체계에 따른 것임이 분명하다. 요람의 제12년은 전에 사용한 체계에 따르면 11년이 될 것인데, 그것에 의하면 왕의 재위 1년은 그가 즉위한 해의 다음 해 곧 달력상 그의 첫 옹근 해를 말한다(참조 71쪽).

 

2025.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