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 속에 위인전> 요람의 죽음, 오므리 왕조의 패망
장지원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¹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 병거를 타고 가서²
예후를 맞을새³
이스르엘 사람 나봇⁴의 토지에서 만나매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⁵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⁶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⁷ 어찌 평안이⁸ 있으랴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⁹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¹⁰
요람의 두 팔 사이¹¹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저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¹²
예후가 그 장관¹³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¹⁵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¹⁶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지니라¹⁴
<노트> 구약성서 열왕기하 9장 21-26절은 에후가 자기를 마중 나온 요람 왕을 살해하였다. 요람이 죽음으로써 오므리 왕조는 4대(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요람) 만에 막을 내린다. 오므리 왕조는 44년간(B.C. 885-841년) 북 왕국을 통치하였다. 요람의 시체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나봇의 포도원으로 만든 왕의 정원에 버려졌다(왕상 21:21:19). 예후가 엘리야의 예언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수년 전 그가 아합의 군대 장관으로 있을 당시 엘리야가 아합에게 찾아왔던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이었다.
메우라¹: (제임스왕역(KJV)에는 “준비하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요람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렇게 명백하게 제시된 징후들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읽고, 다가오는 적을 만나러 나가기 위해 병거를 준비하라고 명할 것이 아니라 도성의 방어를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황급히 나간 사실이 보여 주는 것처럼 요람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예후를 만나러 나갈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는 불안해하고 염려했지만, 그것은 단지 길르앗의 형세에 대한 염려였을 것이다.
가서²: 두 왕이 한 사람을 만나러 나갔다. 둘은 죽었고 하나는 왕위에 올랐다. 두 왕은 의심 없이 무장하지 않고 나갔다. 성에는 그들에게 유리한 요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벽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며, 아마도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이 있었을 것이다. 길르앗 라못을 떠나 길고 격렬한 여행을 한 후라, 예후의 말들과 군대는 지쳐 이스르엘에서 온 기병대를 상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후를 맞을새³: (제임스왕역(KJV)에는 “went out against Jehu”[예후를 향해 나아가니]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더 정확히 말하면, “예후를 만나러” 나아가니. 여기서 “대하여”(against)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부르다”(to call), “만나다”(to meet)라는 어근에서 나왔으며, 문맥이 요구할 때만 “대하여”(against)로 번역해야 한다. 두 왕은 친구로서 한 친구를 만나길 기대하면서 함께 나아갔을 것이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⁴: 이때쯤 예후는 도성과 궁전에 거의 다 왔을 것이다. 요람은 아합이 나봇에게 빼앗은 토지 있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토지의 권리증서는 피로 서명되었다. 처음에 토지를 아합 집에 양도하도록 서명한 것은 나봇의 피였으나, 이제 서명해야 할 것은 아합 집의 피였다(참조 출 20:5 주석). 요람에게 임한 심판은 법의 요구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합 집이 피의 토지에서 나봇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겠는가?
예후야 평안이냐⁵: 요람의 질문은 길르앗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그곳 상황이 좋겠는가?
네 어미…음행⁶: 우상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불충이라는 영적 의미의 음행(대상 5:25; 렘 3:3; 겔 16:15~43; 23:27~30; 호 2:2~10)과 문자적인 의미의 음행을 모두 나타내는데, 팔레스타인의 우상숭배 종교들은 다산 숭배와 관련되었으며 그 종교적인 의식들은 극악한 형태의 음란과 부도덕을 포함하고 있었다(참조 민 25:1, 2; 고전 10:7, 8).
술수. 마술⁷: 사악한 영들을 찾아가는 일, 주문과 부적 사용, 운수 예언, 온갖 종류의 점 등은 고대 동방 종교에서 흔히 있었다(참조 삼상 28:3, 7~9; 왕하 1:2; 17:17; 21:3, 6; 단 2:2; 행 16:16).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출 22:18; 레 19:26, 31; 20:6, 27; 신 18:10~12; 대상 10:13; 사 8:19).
어찌 평안⁸: 요람의 걱정스러운 질문은 예후의 거친 대답과 맞닥뜨렸다. 이스라엘의 미래의 왕은 외교관이 아니라 전사였다. 그의 말은 퉁명스럽고 직선적이었다. 요람이 평화를 운운함으로, 예후의 마음 가운데 격한 분노가 격발되었고,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곤 했던 말보다 더 혹독한 탄핵의 격류가 불운한 왕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⁹: 히브리어 구문은 더 짧게 단지 두 단어 곧 “반역, 아하시야”로 구성되어 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요람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하는 와중에 주위에 있는 말들을 채찍질하며 자신의 사촌에게 경고의 기별을 외쳤다.
활을 당기어¹⁰: 예후는 훈련된 병사로, 개인적인 싸움에서 자주 활을 사용했다. 그가 당긴 화살 하나가 표적을 빗나가지 않고 목적을 이루었다.
두 팔 사이¹¹: 그의 어깨 사이. 요람은 도망하면서 예후에게 등을 보였다. 요람은 등에 일격을 맞고, 화살이 몸을 관통하여 심장을 뚫고 나왔다.
저가…엎드러진지라¹²: 요람은 자신의 나라의 적과 싸우다가 영예롭고 영광스럽게 전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뢰하는 장관이요 친구였던 자의 화살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몇 년 전에 엘리야가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왕상 19:17)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 자 중 어느 누구도 정의의 칼을 피하기를 바랄 수 없다(참조 신 32:43; 롬 12:19). 옛날의 행악자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며, 오늘날 세상도 그러하다. 그러나 죄악이 공변된 보응을 받는 것을 공의가 요구하는 한, 행악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은 실행될 것이다(참조 8절 주석).
그 장관¹³: 참조 7:2 주석.
그 시체를 취하여…던지라¹⁴: 예후는 나봇의 무죄한 피를 복수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아합의 사악함과 이세벨의 죄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 죄악들을 피로 복수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나봇이 일했으며 또한 그의 피가 흘려진 바로 그 밭에 왕의 시체를 던지라고 명했다.
함께 타고…아합을 쫓았을 때. 예후와 빗갈은 모두 역전의 용사였다. 그들은 아합과 더불어 군대에 함께 있었으며, 전시에 이룬 그의 전과와 평화시에 취한 그의 행동을 목격했었다. 또한 그들은 나봇의 죽음 후에 닥칠 운명에 대한 여호와의 형벌을 왕에게 선고하면서 아합을 혹독하게 탄핵하는 엘리야의 증언을 들었을 것이다(왕상 21:19~24). 적어도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후는 하나님의 판결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선언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여호와의 판결이 요람의 죽음을 통해 실행된 이때에 다시 함께 있었다.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¹⁵: (제임스왕역(KJV)에는 “laid this burden upon him”[그에게 이 짐을 내려놓았다]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즉 그에 대한 신탁 곧 화를 선언했었느니라. 사 13:1; 15:1; 17:1; 19:1; 21:1; 22:1; 23:1; 30:6; 41:1; 합 1:1; 슥 9:1; 12:1에 나타난 “짐”(burden) 즉 “경고”의 용례를 비교하라.
내가 어젯날에…분명히 보았노라¹⁶: 이것은 강조하는 주장 혹은 맹세에 사용되는 공식이다. 여호와가 확실하게 나봇의 피를 본 만큼, 확실하게 그 피를 보응할 조치를 취할 것이었다.
(그 아들들의: 이것은 아버지와 함께 나봇의 아들들의 죽음을 처음으로 언급한 구절이다. 아합이 그 포도원에 대한 분명한 소유권을 얻기 위해 나봇의 아들들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을 살려두었다면 왕은 저항 없이 포도원을 소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세벨이 나봇을 죽일 때 그와 함께 그의 가족을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다. 죄 없는 아버지뿐 아니라 무죄한 자녀들도 죽임으로 아합과 이세벨의 죄악은 더욱 잔인 무도하게 된 것이다.)
2025.9.24
'테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경 속에 위인전>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죽음/장지원 (0) | 2025.09.26 |
|---|---|
| <성경 속에 위인전> 아하시야의 살해/장지원 (0) | 2025.09.25 |
| <성경 속에 위인전> 반란을 일으키는 예후/장지원 (1) | 2025.09.23 |
| <성경 속에 위인전> 예후의 기름 부음/장지원 (0) | 2025.09.22 |
| <성경 속에 위인전> 유다 왕 여호람의 통치/장지원 (2) | 2025.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