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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조팝꽃이 피면

노파 2012. 5. 4. 13:45

조팝꽃이 피면

장지원

 

 

올해도 조팝꽃이 피었다.

긴 겨울잠에서 깬 들녘 길을 따라 누렁이 등짐에 가득 거름을 내는 그림은 6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이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아침 조반을 마친 아버지는 누렁이 등에 멍에를 올리고 거름을 싣는 삼태기에 가득 거름을 싣고 고삐를 잡고 삽짝을 나서신다. 못자리하려는 걸음이 부산하면서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소 뒤를 졸랑졸랑 따라나서는 소년은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 유일한 재미에 신이 났다. 골목길을 나와 논둑 길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면서 양지쪽엔 허리를 꼬부리고 핀 할미꽃을 한 줌 꺾어 든다. 논 한 귀퉁이 두렁에는 못자리의 철을 알리는 조팝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꽃핀 모양이 튀긴 좁쌀을 붙여놓았다 해서 조팝나무라고 하는 것 같다. 방향성·밀원식물이다. 식용 또는 약용으로 사용되는 다년생 식물로서 월동하여 봄에 꽃을 피운다. 전국 산야에 흔히 자라는 비슷한 종으로는 둥근 잎 조팝나무, 당 조팝나무, 참 조팝나무, 산 조팝나무, 꼬리조팝나무 등 자생하는 것만 해도 20여 종에 달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관상식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조경화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뿌리는 알카로이드를 함유하고 있어 치열제, 말라리아 치료에 탁월한 효능과 토담증 치료 등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어린 소년은 조팝꽃을 꺾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 같았다. 한 아름 논 귀퉁이에 꽂아놓고 들여다보며 좋아하던 또 하나의 꽃이 소년이었음을 지금에서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음만도 행복하다. 다닥다닥 붙은 꽃은 마치 부잣집 할머니들이 추운 겨울 목에 두른 명주 목도리와도 같았다. 부드럽고 폭신하게 생긴 하얀 꽃 속에 묻혀 즐거워하던 어릴 때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어느새 하얀 모발이 추억을 대신한다. 오십 년이란 시간을 지척에 두고 흘러온 것 같다.

 

어른들이 못자리하는 동안 겨우내 묵은 때를 씻는 게 소년의 할 일이다. 따뜻한 논물에 발을 담그고 때를 불리면서 개구리알도 건지고 까만 올무도 캐서 씹으면 상큼한 봄이 입안에서 흥겨운 노래로 바뀌곤 하였다. 퉁퉁 부른 발의 때를 미는 것은 요즘같이 흔한 비누가 아닌 매끄럽게 생긴 조약돌이다. 누구의 도움 없이 한참을 벗기고 나면 뽀얀 발이 신기하게도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때 일 하시던 어른들이 소년을 힐끔 보면서 ‘다 베껴 놓았으니 서러워 어떠하나!’ 농담을 던지기도 하였다.

 

어머니께서는 따뜻한 논물로 소년의 머리에 쇠똥도 벗기며 감겨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논물은 천연 세제로서 탁월한 기능이 녹아 있었다. 봄에 한 번씩 해묵은 시간을 씻어 버리는 일은 연례행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게 우리 어릴 때의 웃지 못할 추억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조팝꽃이 필 때면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살아나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전설 속에 묻혀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 그만큼 여유의 시간조차 없어 이 봄이 더욱 서럽게 다가오고 있다. 하루해라도 붙잡아 그 시절을 묶어둘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잡아두고 싶다.

 

20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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