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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동네 라디오

노파 2011. 5. 30. 07:38

동네 라디오

老波 장지원

 

 

초등학교 3학년인 원이는 학교에 갔다 집엘 온다.

겨울 날씨가 땅 거죽을 꾸둑꾸둑 얼리고 있는 오후 한나절 햇살은 여전히 따스하다.

동네 사람들이 사랑방에 한 방 가득 모여 있었다.

작은 방에다 책보를 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한구석에는 큰 물독이 자리하고 있다. 또 한쪽에는 갈비가 쌓여 있고, 장작도 몇 아름은 되어 보인다. 늘 어머니는 내게 땔감을 부엌에다 비축하기를 이야기하셨다. 어머니의 일을 덜어드리기 위해, 이 같은 부탁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운 일이었다. 나무를 나르면서도 가지런히 쌓는 것이 내 욕심이었고, 그런 나 자신이 누군가의 칭찬을 듣기를 기대했지만, 번번이 모두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다.

 

부엌엔 온기가 없이 상당히 추웠다.

점심을 먹고 그냥 덮어 놓은 밥상이 배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부뚜막에 앉아 있는 것이 분명 배고픈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배 보자기를 휙 들치니 먹다 남은 노란 조밥이 풀기 없이 누런 놋그릇에 담겨 있었다. 밥 한쪽에는 벌건 고추장이 묻어 있는 것이 먹다 남긴 밥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배가 고프던 참 숟가락을 들고 얼음 같은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씹어본다.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살얼음이 얼어 있는 김치 쪼가리를 반찬으로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어쩌든 허기는 면할 것 같았다.

우리 형제는 육 남매다. 아들 형제가 다섯 명이고, 여동생이 한 명이다. 나는 그중 셋째다. 그러다 보니 점심 끼니는 어머니가 챙겨 주는 일이 거의 없다. 각자 알아서 찾아 먹어야 한다.

먼저 먹는 게 주인이다.

어느 때는 빈 솥에다 빈 그릇만 있을 때가 흔했다.

그래도 오늘은 찬밥일망정 한 술 얻어걸린 게 다행이다. 작은 행복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밥을 급하게 쑤셔 넣고 나니 온몸이 덜덜 떨렸다.

목구멍이 멨다.

바가지를 들고 물두멍을 덮고 있는 판자를 제치니 항아리 가장자리로 얼음이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물을 뜨는 박 바가지에 걸린 얼음덩이가 후드득 떨어진다.

바가지엔 얼음이 둥둥 떠다닌다.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인한 치한이 아닌가 싶다.

단숨에 벌컥벌컥 마시니 미처 못 내려간 조밥 알갱이가 또르르 미끄러져 위 속으로 처박히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늦은 점심을 마친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라 몇 시인지 모른다.

 

궁금했던 사랑방으로 문을 열고 얼굴을 삐쭉 들이민다.

사람들은 내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하다.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일까 조금은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나이가 연만 하신 하얀 모발의 탑평 어른이 보였다.

탑평 어른은 우리 동네에서 태어나서 동내 처녀와 장가를 들고 지금까지 마을을 지켜 오신 분이시다. 이뿐 아니라 동내 구장 일을 오래 보시다 아버지에게 넘겨준 어르신이다. 그 옆엔 평산 아주머니도 보였다. 충구 형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충구형은 탑평 어른의 둘째 아들이다. 나의 큰 형님과 친구 사이다.

채락이 형님은 면도하지 않아 덥수룩한 얼굴로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꼭 병든 병아리 같아 보였다.

열대여섯 명 되는 사람들이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좁은 방 안에 앉아 무엇인가 소리에 귀를 귀 울려 듣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더 궁금해졌다.

아버지 옆에는 이제까지 보지도 못했던 하얗고 예쁘게 생긴 상자 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거기서 소리가 나고 있는데, 사람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상해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하면서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당신의 옆으로 꿇어앉히신다.

옆에 있는 이상한 상자를 가리키면서

“이게 나지오라는 거다. 여기서 사람들의 말이 나오니 너도 잘 들어 보거라.”

아버지는 그동안 동네 구장의 일을 맡아보아 왔다.

동네일이 이것저것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와서 소식을 전하고,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출생신고는 늘 아버지의 몫이 된 지 오래다.

한 번도 동네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시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래도 우리가 밥술이나 먹는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동네 어른 들 잔심부름도 곧장 하시면서 모자라는 잔돈은 늘 채워 가면서도 천직인 양 그냥 기쁘게 봉사하시는 분이셨다.

 

하루는 장날 아버지는 내 고무신을 사주시겠다고 하셨다.

학교를 파하고 아버지를 찾아 장 골목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아버지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아버지가 어느 대폿집 주막에서 동리 어른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를 만난 반가움에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벌써 아버지는 술에 취한 듯 얼굴이 벌건 것이 주홍이 짙었다.

같이 마시는 아저씨들도 취한 듯 나를 보고, 니 왔나 하며 아는 척을 했다.

나는 다가서며

“아부지요. 고무신 사주소. 빨리 가이시더.”

아버지 두루마기 자락을 잡아끌었다.

언제나 아버지는 한복에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다.

읍내에 사시는 큰아버지도 한복만 입으신다.

지금 생각하니 한복만 입으시는 사람이 농사일이며 무슨 험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할아버지 때부터 평생을 아래에 일꾼만 부리고 살았다고 했다.

고모들이 여섯이나 되는데 밭에 나가 일하시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다.

아버지는 아침에 나와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기분이 좋아 새처럼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 문제가 생기고 만다.

대충 술자리를 마무리하시면서 술값을 굳이 아버지가 내시겠다고 하시면서 지갑을 꺼내시는 아버지를 말릴 사람이 없었다.

두 어르신은

“그럼, 구장 잘 먹었네.”

“그래 일 보게”

하면서 주막을 먼저 나가신다. 아버지의 지갑에 돈은 술값을 치르기에 턱없이 부족하였다.

지갑의 돈을 모조리 털어 주고는,

“거촌 댁 모자라는 돈은 다음 장날 내가 줄 것이니 달아놔”

하신다.

거촌 댁은 그래 알았어. 하는 모습이 아버지의 말에는 관심도 없고 다른 장사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툭하면 외상술을 드신다.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자주 이야기하시면서 그런 아버지를 못마땅하다고 자주 말씀을 하셨다.

내 고무신은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원아 다음 장날 사자 집에 빨리 가라.”

하시며 나를 떠밀다시피 쫓고는 또 어디론가 가버린다.

늘 아버지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난전에서 스웨터를 사주겠다고 하시며, 입어보고 가격까지 흥정해 놓고 돈이 모자라 그만둔 적이 있었다. 술 먹는 돈은 아깝지 않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도 하는 수 없이 아버지와 장거리에서 헤어져서 집으로 갈 수밖에 없다. 맥이 빠져 터덜터덜 걷는 구멍 난 고무신 사이로 모래가 들어와 몇 번이고 신발을 털어 신었다.

나도 모르게 억울한 생각에 눈물이 났다.

아버지가 약속하게 생각되었다. 같이 술을 먹은 어른들이 밉기도 했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 구장이란 일이 사람들 앞에서 모든 일을 시작부터 끝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솔직히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순간 집에 계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근심 걱정이 더 늘어만 갔다.

 

그런데 오늘은 면사무소에서 지금 듣고 있는 라디오를 한 대 타 오신 것이다.

라디오를 놓고 무척 기뻐하시는 모습을 오래만 에 본다. 나도 덩달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좀처럼 얼굴에 웃음이 없으신 분이시다.

내 기억의 할아버지도 엄격하시면서 근엄하신 선비로 알고 있다.

이를 두고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오늘따라 밝은 모습은 오래 두고 내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대통령께서 하사하신 라디오라 했다. 일제 나셔날 이란 빨간딱지가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소리가 아주 맑고 청명했다. 나도 처음 보는 라디오였다.

이 라디오가 우리 마을에 처음 들어온 1호이다.

너무 신기했다.

아주머니들은

“이 작은 상자 속에 워찌 사람들이 많네! 그려”,

신기하다는 듯이 듣고 좋아했다.

그날 이후 동리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낮에는 노인들이 라디오를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저녁 먹기가 바쁘게 방안을 가득 메우고 라디오를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즐기며 라디오 사랑에 푹 빠졌다. 이 신통방통한 라디오는 항상 사랑방에서 아버지 곁에 누울 자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평상시같이 학교를 다녀왔다.

방 안에 있어야 할 라디오가 보이질 않았다. 다짜고짜로

“아부지요. 나지오 어디 갔어요.”

라고 들이 됐다. 아버지의 표정이 썩 밝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말인즉 반장인 내화가 저도 집에서 좀 듣겠다고 해서 가지고 갔다.

그도 동내 반장이니 들을 자격이 있다나. 해서 그 집에 갔다. 고 했다. 라디오가 없는 방안이 무척 허전했다. 그런 아버지가 바보같이 보였다. “왜 그걸 쫓니, 껴.” 어린 나는 생각 없이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하고 말았다.

마음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없이 쓸쓸하기까지 했다. 순간 라디오를 찾아와야 한다. 빨리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날마다 우리 집에 모이던 사람들이 안 보이는 게 싫었다.

그때 내 나이 11살, 작은 괘가 났다.

저녁을 먹고 난 나는 슬며시 집을 나와 반장 어른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나의 이런 행동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라디오를 찾아오기까지 나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이 들었다.

반장 내화 어른의 택호는 갓띠 어른이시다. 갓띠에서 살다가 우리 마을에 오신 지가 몇 해 안 된다.

문밖에서 보니 저녁을 끝내고 온 식구가 라디오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큰 소리로 갓띠 어른 계시니 껴. 반장 댁 문 앞에서 인사를 올린다. 이때 바로 안에서 대답이 들린다.

“누구노. 누가 왔노.”

갓띠 어른의 목소리는 나의 상황을 모르는 듯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들려왔다.

“예, 워이씨더(원이의 사투리) 진지는 잡수셨는 겨.”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멋들어지게 했다. 들어오라는 말씀과 동시 방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그 라디오였다.

조그마한 나무 상자 위에 올려놓은 라디오에서 연속극이 나오고 있었다. 식구들이 귀를 모아 듣고 있었다.

거기서 보는 라디오는 여전히 신기하고 놀라운 물건이 틀림없었다.

반장 어른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니 뭐하로 왔노.”

특유의 어감으로 나를 째려보며 묻는다.

나는 조금은 겁도 났지만, 용기를 내어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예. 갓띠어르신.”

하고 말을 하려는 찰나, 그때 나보다 한 살 위인 반장 어른의 아들 지섭이가 말을 건다. “우리 저 방에 가서 놀자.”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말을 바로 받았다.

“아이다. 지섭아. 나는 아부지 심부름을 왔데이. 그러니 니나 놀아라.”

아버지가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을 또 하고 말았다. 얼굴이 화로같이 달아올랐다. 가슴도 콩닥콩닥 뛰면서 내 괘가 들통이라도 나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되었다. 잠시 방 안의 공기는 싸늘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갓띠어른요. 아부지가 라디오 가지고 오라 했니더”.

내 말을 듣고 있던 반장 어른은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그래 그러면 가지고 가거라.”

하시며 라디오를 탁 크더니 기분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라디오 상자를 들어내 손에 덥석 안겨 주셨다.

“빨리 가지고 가뿌래라.”

하시며 영 나를 못마땅하게 보시는 표정이 무서웠다. 더 이상 그쪽 눈치를 살필 겨를도 없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오면서 인사도 못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나섰다.

순간 지섭이 얼굴이 떠올랐다.

반장 어른의 기분이 몹시 나빴을 것을 생각하니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안 좋은 생각이 하늘의 별처럼 쏟아진다. 어둑한 골목길을 돌아 집에 들어온다.

내 손엔 라디오가 들려 있었다.

모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아부지 라디오 찾아왔습니더.”

나는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 혼이 나게 야단을 맞았다. 그래도 나는 라디오를 찾아왔기에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옳고 멋진 일을 한 것 같아 속으로 어깨가 으썩하고 가슴이 뿌듯했다.

“누가 니한테 그거 찾아오라고 했나.”

아버지의 불 호통이 떨어졌다.

아버지의 난감한 심정을 나는 이해 할 리 없었고, 두 분 사이에 싸움만 붙인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아버지의 표정만 살피며 쥐 죽은 듯이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는 라디오에 안테나를 연결하시더니 라디오를 탁하고 켜신다.

여전히 라디오는 맑고 고운 소리로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다시 아버지의 표정을 살핀다.

아버지의 내심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속으로 휴 한숨을 쉬어 본다.

아버지는 내게 타이르듯 말씀하셨다.

“니 다음부터 시키지도 않은 이런 짓 하지 말거라. 알았나. 나이도 쥐방울만 한 놈이 어디 겁도 없이.”

하시며 허를 꺽꺽 차셨다.

나는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늘 정의감에 불타 있었다.

이유 없이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다. 지금도 그런 성격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손해를 볼 때도 많다.

내 위에 두 형님은 오늘따라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오늘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뭐가 옳은지 그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쩌든 아버지의 라디오를 찾아왔다.

내일부터 사랑방엔 동리 사람들이 모여 연속극을 들을 것을 생각하니 작은 마음에도 기쁨이 벅차올랐다.

 

1964년 10월 10일 제18회 동경 올림픽의 성화가 오른다.

대회는 10월 10일부터 10월 24일까지 열렸으며 대회 규모로는 93개국에서 5,14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우리나라는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 매달 합계 3개로 종합 26위를 기록했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중계방송이 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이 중계방송을 들으려고 마당에 멍석을 깔고 열심히 들었다.

우리나라 선수가 이길 때면 이광재 아나운서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국민 여러분 기뻐하십시오.라고 외쳤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였다.

그때의 기억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하루는 면사무소에 다니는 사촌 형님이 라디오를 빌려 달라고 찾아왔다.

사촌은 우리 집에서 두 집 건너에서 산다.

무슨 마음이 들어서 온 것인지 조카 앞에서 난감해하시는 아버지의 안색을 읽을 수 있었다.

결국 사촌은 그날 저녁 라디오를 가지고 갔다.

우리 집은 또다시 적막강산이 되었다.

다음 날 저녁 사촌 형님 집으로 라디오를 들으러 갔다. 그 집 식구들은 내가 온 것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그 정도의 눈치는 나도 있다. 잠시 듣다가 일어나 슬며시 집으로 돌아왔다. 사촌은 라디오를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동내 물건은 누구나 돌려가며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주인 없는 라디오가 이 집 저 집 다니며 고생하는 것이 싫었다.

 

여러 날이 지나고 사촌 형님 댁에, 서울에서 사촌의 처남이 왔다. 그분의 이름은 섭이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내 눈에도 도시 태가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분이 올 때 조그마한 일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가지고 왔다. 밤색 가죽 커버에 조그마한 게 앙증맞게 생겼다. 잠깐 들을 기회가 있었다.

소리가 카랑카랑한 게 너무 좋았다.

이것에 비하면 우리 라디오는 진공관 라디오로 크기는 몇 배 커서 비교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면사무소에서 아버지가 타 오신 우리 라디오가 좋았다.

그 시절만 해도 서울에서도 그런 라디오를 갖고 듣는 사람들이 드물었다고 한다.

괘나 부자인 것 같았다. 며칠 후 섭이라는 분은 다시 서울로 가게 되었다.

라디오를 갖고 가려고 했는데 사촌 형이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얼마 지난 후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사촌 형님은 욕심이 대적 같다고 고모들도 앉으면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촌 형은 우리 라디오를 더 갖고 있을 이유가 없어지자 곧바로 돌려주었다.

길게 철삿줄로 안테나를 치는데 우리 집 뒤 감나무에까지 뻗쳐 걸었다.

이것이 바로 전파 싸움으로 번지며 우리 집과 사촌들 사이에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욕심이 많은 것 같아 나는 늘 경계를 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도 사촌 형님을 욕하고 비웃는 것을 가끔 보았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도 편하지 못했다.

사촌이 돌려준 라디오는 여전히 동네 사람들의 좋은 친구로서 온갖 소식을 서울에서 날아왔다.

라디오가 우리 생활에 수많은 이야기와 화젯거리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이 라디오를 동내 라디오라 했다.

세월이 흐르고 한 참 후 마을에도 회관이 지어졌다. 아버지는 동내 라디오를 회관에다 갖다 놓으셨다.

라디오가 여러 차례 생각지 않은 사람들에게 수탈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동내 라디오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삶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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