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6월6일[대선지서-이사야2장1-4절]
장차 올 왕국에 대한 약속
장지원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주> 1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참조 1:1 주석.
2 말일에…것이라: 2~4절의 기별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1) 이것은 땅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옛 땅과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옛 지위를 회복하여 이 땅을 통치하고 또한 온 세상의 회심을 완성시키는 천년기를 일컫는다; (2) 이것은 살전 5:1~15; 계 13:11~17 등에 언급된 것과 같은 지구 역사의 마지막 때 세상을 완전히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배도한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는 거짓 신앙부흥 운동을 묘사한다; (3)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통로가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본래 계획을 묘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실패와 거절 때문에 여기에 언급된 예언은 오늘날 하나님에 의해 택함받은 사람들이 땅 끝까지 복음 기별을 전하는 것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다른 모든 성경 구절처럼 사 2:2~4도 그 참된 의미와 또한 오늘날의 교회와 관련된 그 의미의 중요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성경 자체가 이 주제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상상에 기초한 여러 해석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들과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유대인들의 역할과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보려면 36~54쪽을 참조하라.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놀라운 격려의 말씀들”을 담고 있는 많은 “실제적인 교훈들” 중 하나로, 미 4:1~3의 평행구절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언급을 보려면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455, 456을 참조하라.
미 4:1~3은 쓰인 단어들까지도 사 2:2~4과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가서에 쓰인 이 구절의 문맥에 대한 연구는 이사야서의 평행구절의 뜻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임이 분명하다. 이사야와 미가는 여러 해 동안 함께 생존해 있던 동시대 인물이었다.
말일: 히브리어 아하리트 하이야밈(’ah.arit hayyamim). “마지막”이란 의미의 아하리트는 일반적으로 기간의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어떤 기간이든지 말하는 사람이 의중에 있는 기간의 끝을 가리킨다. 아하리트는 (1) 이스라엘이 객으로서의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때(창 49:1) 곧 430년의 끝(참조 창 15:13, 16 주석 ), (2) 광야 방랑 생활의 끝(신 8:16), (3) 장차 있을 환난과 유배 생활의 끝(신 4:30; 호 3:5), (4) 역사적 기간의 끝(신 31:29), (5) 어떤 행실의 궁극적 결과(잠 14:12; 23:32; 사 47:7), (6) 한 해의 끝(신 11:12), (7) 삶에서 시련과 시험 기간의 끝(욥 42:12) 등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성경 예언에서는 이 단어가 (1) 헬라 제국의 끝(단 8:23), (2) 1260일과 2300일의 끝, (3) 세상 끝에 이방인들을 모으는 일(사 2:2; 미 4:1), (4) 메시야 왕국이 세워지기 직전에 곡과 마곡이 일으킬 전쟁(겔 38:6, 7, 16), (5) 마지막 큰 심판의 날(렘 23:20; 30:24), (6) 악인들의 궁극적 종말(시 37:38) 등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아하리트가 70인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마지막”, “끝”이라는 의미의 에스카토스(eschatos)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시작”을 의미하는 레쉬트(re’s∨it)의 반의어인데, 그것의 뚜렷한 실례가 “이전”과 “처음”이 “결국”과 “종말”에 대비되는 의미로 쓰인 사 41:22; 46:10에 나타난다.
성경에 나온 아하리트의 용례에 근거해 볼 때 미래에 있을 “끝”이 얼마나 먼 미래를 일컫는지는 각 경우마다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함이 분명하다. 사 2:2에서의 “말일”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나타나는 일((10절),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그날”(11, 17절), “여호와의 날”(12절), 그가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때(19절)와 연관이 있다. 사 2:10~21을 계 6:14~17과 비교해 보라. 평행구절인 미 4:1~4에는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시는 때가 언급되어 있다(7절). 이는 또한 시온이 바벨론 유수로부터 “이전 권능”을 회복하는 때와도 연관돼 있다(8, 10절). 따라서 사 2:2의 “말일”은 메시야 왕국이 세워지기 직전을 의미한다.
42, 43쪽에 설명되어 있는 해석 원칙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본래 계획 속에서는 메시야 시대가 바벨론 유수에서 회복되는 기간의 절정으로서 도래하도록 되어 있었다(참조 선지자와 왕 703, 704,).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광과 만방에 대한 그들의 통치에 관한 많은 언약을 성취하실 수 있는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사 2:1~4은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성취되지 못하였다.
여호와의 전의 산: 70인역에는 사 2:2이 “여호와의 산과 하나님의 전”으로 되어 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은 통상적으로 모리아산 위에 위치해 있던 성전(참조 왕하 3:1 주석; 렘 26:18; 미 3:12)을 지칭하는 용어이다(왕상 8:63 등). 이곳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배하는 중심지로 택하신 “곳”(신 12:5, 6, 14; 16:16)으로 유대교의 중심과 상징이 된 장소였다(왕상 8:29, 30 등). 유대 종교 제도는 성전과 그곳에서 행해지는 봉사들과 너무나도 밀접히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BC 586년과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되자 그 제도가 상당 부분 효력 정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예레미야가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였을 때 그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외쳐댔다(참조 렘 26:1~9). 예수께서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 잘못된 고소는 예수에 대해 거짓 증인들이 날조할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고소였다(막 14:58; 15:29; 요 2:19).
따라서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모든 종교와 신들 위에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권능의 상징 곧 국력의 상징으로서의 “산”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사 2:14; 렘 51:25; 겔 6:2, 3; 36:1, 4; 슥 4:7; 계 17:9, 10을 참조하라. 다니엘은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계에 가득”한 “태산”으로 일컫는다(단 2:35). 이방인들이 “거룩한 산”으로 나아오는 것에 대한 다른 실례를 보려면 사 11:1, 10; 56:6~8을 참조하라.
모든 산꼭대기에: 히브리어 브로쉬 헤하림(bero’s∨ heharim). “산들의 꼭대기 위에”, “산들의 가장 중요한 곳에”, “산들의 가장 중요한 곳으로서”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어떻게 번역하든지 의미는 동일하다. 만일 “여호와의 전의 산”이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면 “모든 산”은 이 땅의 다른 종교들을 일컫는 것임이 분명하다. 종교로서의 유대교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공동운명체였다. 하나님이 바로 이 이스라엘을 지상의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나게 만들고자 하였다(참조 39, 40쪽; 부조와 선지자, 314).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택한 도구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본래 계획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민족이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우월성과 지도력을 인정하는 날이 이르러오게 되어 있었다(40~43쪽). 한 국가로의 이스라엘이 높임을 받는 영광스런 모습이 구약 전반에 걸쳐서, 그중에서도 특히 이사야서에 계속 반복해서 등장한다(선지자와 왕 367, 368,). 이사야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그들에게로 달려올 것에 관해서(55:5),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여호와께 연합하기 위하여(14:1; 56:6) 먼 곳에서부터 올 것에 관해서(45:14; 49:6~8, 12, 18, 22),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들을 그의 “성산”으로 인도하셔서, 그 결과 그곳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실 것에 관해서(56:7, 8), 이방인들이 그들의 재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것에 관해서(60:3~11) 이야기한다. 예레미야는 이방 민족들이 “땅 끝에서”올 것(렘 16:19)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일 것(렘 3:17)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스가랴는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그의 “백성이 될” 날(슥 2:11)과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을 날(슥 8:21, 22. 참조 슥 14:16)을 내다보았다. 이처럼 결국에 가서는 이스라엘 나라가 지구 전체를 끌어안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290; 슥 9:9, 10).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진리가 궁극적 승리를 거두는 이 같은 영광스런 상황이 성취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이 일이 영적 이스라엘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따라서 사 2:1~5은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택한 도구 곧 그분의 교회를 통한 복음의 영광스런 승리를 묘사한 것이다(참조 계 18:1 주석; 49~51쪽).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만방”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에 관한 2절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구약의 선지자들이 반복적으로, 때로는 동일한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는 말을 제시하고 있다.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명백한 우월성을 인정하면서(신 4:6, 7; 28:10; 사 61:9, 10; 62:1, 2; 렘 33:9; 말 3:12), 또한 그들의 “열조의 계승한 바는 허무”한 것임을 고백하면서(렘 16:19), 이방 민족들이 서로에게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고 말할 것이며(슥 8:21, 22), 또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고 말할 것이다(슥 8:23). 열방이 참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모일 것에 대한 이 약속은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성취된 적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그 일의 성취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약속은 현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적으로 성취될 것이다(참조 45, 46, 49쪽).
오라 우리가…에 오르며: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신실하였다면 열방 민족들이 참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의 매력을 깨달음으로 이방인들의 입술에서 이 같은 말이 흘러나왔을 것이었다. 슥 8:21, 23의 “우리가 속히 가서…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라는 구절과 비교해 보라.
여호와의 산: 2절의 “여호와의 전의 산”과 같은 의미임.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는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가자”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사해 두루마리 1QIsa(참조 제1권, 32; 이사야 서론)에는 “여호와의 산에”라는 구절이 빠져 있다.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의미임. 이스라엘은 야곱의 언약 이름이었다(참조 창 32:28 주석). 이방인들이 단순히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라고 말한 사실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위대함이 그 백성이 하나님의 계획에 협력하고 또한 참하나님을 섬긴 것에서 기인하였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전: 즉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참조 2절 주석).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55:5에서 이사야는 열방이 “여호와 네 하나님”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으로 달려올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이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성전이 실제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었다(56:6~8).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심사를 이스라엘의 관심사와 연합하기 위하여 모든 나라들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슥 8:23)라고 말할 것이었다. 마침내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올(9:7) 사람과 열국이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할(14:16) 것이었다. 이 일은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16절)이 하나님이 내릴 재앙으로 고통을 당하고(12, 13, 19절) 난 후,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9절)으로서 통치하실 때 실현되도록 되어 있었다. 겔 38:8, 16, 18, 20~23; 39:1~2; 슥 12:2, 3, 8, 9; 14:1~3과 비교해 보라.
시온에서부터: 예루살렘은 “열국의 여왕으로 번영을 자랑”하며 또한 “강력한 지상의 수도로 세워”지도록 되어 있었다(시대의 소망, 577). 성전(선지자와 왕, 46)과 그 성읍 둘 모두 “영원히 남아 있”을(각 시대의 대쟁투, 19) 것이었다. 지상의 나라들이 유대인들을 존중하고 또한 그들이 만민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의 수탁자임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신 4:7, 8; 롬 3:1, 2).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난 원칙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시키는 방편이 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실물교훈, 286).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가 증가됨에 따라 저희는 국경선을 점점 넓혀서 마침내 저희의 나라가 온 세계에 미쳐야 했다”(실물교훈, 290).
4 그가…판단하시며: 지상의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3절)을 즐겨 순종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통해 행사된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품성을 하나님의 율법에 조화시키는 일을 통해서는 얻고자 하지 않았던 그것을 무력을 사용해 손에 넣기 위하여 함께 동맹하게 될 것이었다(렘 25:32; 겔 38:8~12; 욜 3:1, 12; 슥 12:2~9; 14:2).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성읍을 포위하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하나님과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렘 25:31~33)과 그분이 자신들을 심판하여(욜 3:9~17) 그곳에서 멸하실 것임(사 34:1~8; 60:12; 63:1~6; 66:15~18)을 발견하고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었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의 바로 동쪽에 위치한 여호사밧 골짜기 근방에 모여 있을 때 하나님이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실(욜 3:12) 것이었다. 여호샤파트(Yehos∨apat.)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여호와가 심판하실 것이다”이다.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천하만국”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이지만(슥 12:3), 하나님이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시고(슥 12:8)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슥 12:9) 멸하실 것이다. 여기에 묘사된 사건들은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성취된 적이 없는데, 이는 그 나라가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시자 요한이 지적한 것처럼(계 20:7~15) 이 예언은 천년기의 끝에 사단이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며(8절) 저희로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게(9절) 할 때 부분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악인들은 “보좌 앞에 서”서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데(11, 12절),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13절). 지상의 나라들이 모두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겔 38:23). 슥 12:4; 계 19:19~21과 비교해 보라.
보습. 히브리어 잇팀(’ittim). 농업 기구의 일종으로 아마도 “보습”이나 “곡괭이”일 것으로 생각된다. 악갓어에서는 이 단어가 “쟁깃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전쟁 무기들이 평화의 도구들로 바뀌는 현저한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모두 정복당한 후에 그 남은 자들은(참조 슥 14:16) 자신들이 사용했던 전쟁 무기들을 다시 평화의 도구들로 바꾸어 만들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계획은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성취된 적이 없었다.
이 나라와 저 나라가…서로 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패배를 당한 후에 남은 나라들은 모두 자원하여 이스라엘의 지도력에 복종하게 된다. 예루살렘 성벽으로부터 “평화의 비둘기가 모든 민족에게 날아”간다(시대의 소망, 577). 예루살렘은 “안연히 서”게 된다(슥 14:11).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한다(욜 3:17, 18). 그 성읍은 그 이름의 의미처럼 참으로 “화평의 소유자” 혹은 “화평”의 근원이 된다. 물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계획은 배도로 인하여 성취되지 못하였다.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호 2:18; 시 46:9과 비교해 보라. 실제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한 것을 그들이 구약 시대에 언약 백성으로서 지녔던 지위를 다시 회복할 것에 대한 예시라고 믿는 사람들은, 사 2:1~4과 미가서에 나오는 평행구절(4:1~3)을 평화의 천년기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해 왔다. 그들은 천년기 동안에 유대인들이 이 땅을 통치하며 또한 온 세상을 하나님께로 회심시킬 것으로 믿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해석은 성경에서 전혀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해석이다. 이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논박하고자 시도하는 중에 이사야서의 이 성경절들을 거짓 신앙 부흥 운동에 대한 언급으로 설명한 사람들이 있다. 이 견해에 대한 고찰은 이사야서의 이 구절과 구약 전반에 걸쳐서 발견되는 이와 유사한 구절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36~54쪽에 언급된 것처럼 성경은 지속적으로 여기에 나타나 있는 광경을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신실하였다면 실현되었을 상황 곧 이방인들이 그들에게로 모여드는 일에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한 행위로 인해 이 목적의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예언은 지상의 모든 민족에게 최후의 복음을 선포하는 영적 이스라엘에게 성취될 것이다(계 14:9~11; 18:1~4. 참조 49~51쪽).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454, 455에 사 54:11~14; 렘 31:33, 34과 더불어서 미 4:1~3에서 발견되는 그 평행구절의 일부가 그리스도께서 “교사들과 부모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교훈들을 가르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실제적인 교훈들” 가운데 하나로 인용된다. 이 구절은 또한 “놀라운 격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귀중한 보석들을 쌓아둔 보물 창고”와 같은 성경 구절 중 하나로 인용되기도 하였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456). 만일 사 2:1~4과 미 4:1~3이 오늘날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놀라운 격려의 말씀”의 실제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면 이 구절들을 구약에 나오는 이에 필적하는 구절들과 더불어 고찰해 보아야만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항들이다.
1. 이사야는 2~5절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임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사 2:1. 참조 미 4:2). 구약 전반에 걸쳐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비록 불완전하고 결점이 있다 해도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 또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신다(참조 민 23:21).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불린 적이 없다. 그는 결코 바벨론이나 애굽이나 에돔을 “유다와 예루살렘”이라 부르지 않으신다. 5절에 나오는 “야곱 족속”에게 하시는 호소의 말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신실히 행한 결과로 인해 얻어질 영광스런 미래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빛에 행하”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참조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455, 456).
2. 어떤 사람들은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3절)이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하는 말이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언급된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 발견되는 그분의 뜻에 전적으로 조화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만 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말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술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이다. 게다가 이와 동일한 사상이 종종 단어 하나도 틀리지 않게 구약 전반에 걸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의 입술에서 발해진다. 예를 들어서 슥 8:21~23과 비교해 보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하려 하노라 하리라.” 여기에서 “열국”의 “백성”은 사 2:3과 내용이 동일한 말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열국이 이스라엘로 모여드는 것에 대한 표상임을 확인해 주신다. 슥 8:21:23을 참된 부흥 운동에 대한 표상으로 해석하면서 사 2:2~4을 거짓 부흥 운동에 대한 표상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매우 모순된 일이다. 참조 신 4:6, 7; 사 45:14; 49:6, 12, 18, 22; 55:5; 56:6~8; 61:3~11; 렘 3:17; 16:19; 슥 2:11; 14:16; 말 3:12.
3. 사 2:2의 말은 “많은 백성”(3절)이 하는 말이 아닌 여호와가 하시는 말씀이다. 2절에서 “만방”이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모여”드는 사실을 확언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신 일을 거짓 신앙 부흥 운동으로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이 자신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방”이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3절에서는 “많은 백성”이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되지 않고 잘 조화된다.
4. 만일 3절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거짓 신앙 부흥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구약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이와 유사한 표현들도 모두 이와 동일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5. 사 2:3의 말을 살전 5:3의 “평안하다, 안전하다”라는 외침과 동일시하는 것은 시 46:9; 호 2:18 등과 같은 구약 구절들의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미 4:4에서 하신 추가적인 약속을 문맥(5~8절)에 비추어 연구해 보면 이 말이 메시야 왕국의 영원한 평화에 대한 언급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참조 사 32:15~18).
영감의 말씀은 마지막 때 큰 거짓 신앙 부흥 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명백히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같은 종류의 부흥 운동이 아니다. 거짓 부흥 운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예수께서는 거짓 신앙 부흥 운동을 이끄는 성직자들의 기별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는 특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4:213~27). “거짓 것이 참것과 너무도 유사할 것이므로 성경이 아니면 그것들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593). 그때가 이르게 되면 오직 진리에 대한 참된 사랑과 성경과 예언의 신이 지시하는 바에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이 우리를 원수의 미혹과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의 교훈들에서 보호해 줄 것이다(호 6:6; 살후 2:9~12; 교회증언, VI, 401; 교회증언, VIII, 298;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475).
진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세상이 이 같은 미혹에 빠져서 타락하게 될 것이다(참조 계 13:13~15; 각 시대의 대쟁투, 562). 기독교의 이름만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연합하게 될 때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은 이 연합을 온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대부흥 운동으로 여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구체적으로 온 세계가 회심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각 시대의 대쟁투 588, 589,; 초기문집, 261; 참조 초기문집, 282). 이 거짓 부흥 운동은 계 18:1~4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와 경고의 기별이 선포되기 바로 직전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이 기별을 받아들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464). 이것은 “평안하다, 안전하다”하는 외침으로, 사단은 바로 이 외침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안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심어 주어 그들로 안심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들이 이것이 거짓된 외침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너무 늦게 될 것이다(살전 5:1~5. 참조 렘 6:14; 8:11; 초기문집, 282; 부조와 선지자, 104; 각 시대의 대쟁투, 562; 실물교훈, 411; 교회증언, V, 715). 이 큰 거짓 신앙 부흥 운동에서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모든 자들이 다 연합할 것이다(딤후 3:1, 5).
거짓 부흥 운동이 참부흥 운동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참부흥 운동에 대한 성경의 묘사도 당연히 어느 정도는 거짓 부흥 운동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따라서 영감의 말씀이 복음 사업의 말미를 장식하게 될 경건한 자들의 참부흥 운동에 대한 묘사임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는 계 14:6~11; 18:1~4 등과 같은 성경절에서 사단이 모방하고자 애쓰는 점들이 발견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 앞에 놓여 있는 큰 위기의 때를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영감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이와 관련된 모든 구절을 연구해야만 한다.
구약의 예언에 기발한 해석을 갖다 붙임으로 그 예언을 혼동시키고 잘못 적용하는 시온주의와 다른 운동들에 대한 거짓 주장들, 또한 다른 여러 잘못된 해석들과 마주치게 될 때 우리가 “전혀 건전하지 않은 논법을 사용하도록 우리 스스로를 결코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을 침묵시킬 뿐 아니라 가장 주도면밀하고 가장 엄중하게 살펴보게 하는 건전한 논법을 제시해야 한다”(교회증언, V, 708). 거짓 신앙 부흥 운동에 관해서는 영감의 말씀이 우리에게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같은 운동에 대하여 명백히 예언하고 있는 다양한 성경 구절들에 의존하여 이 중대한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이 일을 할 때 우리는 모든 성경 연구와 해석, 그중에서도 특히 구약의 선지서에 대한 연구와 해석에서 그러하듯이, 36~54쪽에 제시되어 있는 원칙에 조화되게 해석하기 위하여 마땅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026.6.6
'테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여호와의 한 날 (0) | 2026.06.08 |
|---|---|
| 주의 날에 있을 교만한 자의 심판 (0) | 2026.06.07 |
| 처음과 같이 회복할 것이라 (0) | 2026.06.05 |
| 내 백성이 패역하여 (0) | 2026.06.04 |
|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0) | 2026.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