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 왕 아사랴의 통치
장지원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¹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아사랴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²
오직 산당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³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⁴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⁵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 일을 다스리며⁶ 국민을 치리하였더라⁷
아사랴의 남은 사적⁸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사랴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⁹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노트> 구약성서 열왕기하 15:1-7은 (B.C. 790년경) 남 유다의 아사랴(웃시야)는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주변 열국들에게는 여로보암 2세의 위치로 부상한 왕이었다. 그는 통차 초기 곧 스가랴 선지자가 살아있던 동안에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았다. 그러나 스가랴가 죽은 후에는 교만해져서 직접 제사장의 직무까지 수행하려 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문둥병으로 죽게 하셨다.
아사랴¹: 웃시야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13, 30, 32, 34절). 이 축약형은 역대기(대상 3:12에 기록된 다윗의 계보는 예외임)와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스가랴서에서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다양한 이름의 형태에 관한 여러 실례 중 하나이다.
정직히 행하였으나²: 일부 통치기간에만(참조 5절).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 26:5).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³: 산당이 모두 우상숭배만을 위한 신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제사를 위하여 공인되지 않은 장소들이었으며,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하지 않고 이런 장소에서 희생을 드렸다(참조 12:3).
치셨으므로⁴: 이 사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기록에 대해서는 대하 26:16~21을 참조하라. 아사랴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교만해져서 마음이 한껏 들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성전에서 분향하려던 중에 문둥병에 걸렸다.
별궁에⁵: 따로 떨어진 집을 말한다. 히브리 율법은 문둥병자들이 “진 밖에”(레 13:46) 홀로 거할 것을 요구한다.
궁중 일을 다스리며⁶: 요담은 부친이 문둥병에 걸린 시점부터 국가를 통치하는 섭정이 되었다.
국민을 치리하였더라⁷: 왕은 국가의 최고 법관이었다. 부친인 아사랴가 통치하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요담은 이제 부친을 대신하여 왕이 져야 할 모든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남은 사적⁸: 블레셋인과 아라비아인, 마온 사람(Mehunimites)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 암몬에 대한 세력 강화, 예루살렘의 요새화, 가축 사육과 농업에 대한 관심, 사막 지역에 망대를 건축한 것, 군대의 재조직 및 재정비, 공격 무기를 위한 기계 제조, 성전에서 분향하려다가 문둥병에 걸린 일, 그의 장례에 관한 사항 등이 아사랴의 “남은 사적”에 해당한다(대하 26:1~23).
아사랴가 자매.⁹:이사야는 아사랴가 죽던 해에 하나님의 이상을 보게 된다(참조 1절; 사 6:1, 8).
여러 해 전 예루살렘에서 잘 조각된 석판이 발견되었는데, “이쪽으로 유다 왕 웃시야(아사랴)의 유골이 옮겨졌음. 개봉하지 말 것”이라는 명각이 적혀 있었다. 이 명각이 그리스도 당시에 사용되던 정방형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석판도 같은 시기에 준비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필시 본래 무덤이 약탈당했거나 아니면 폐허가 된 후에 웃시야의 유골을 옮겨다 놓은 지점을 표시한 것일 것이다.
202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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