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왕 아마샤의 통치
장지원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년에¹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²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³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서매⁴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⁵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⁶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아마샤가 염곡⁷에서
에돔 사람 일만을 죽이고 또 셀라⁸를 쳐서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⁹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¹⁰ 한지라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¹¹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들에게 주어¹²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¹³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¹⁴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¹⁵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왕 아마샤로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¹⁶에서 대면하였더니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¹⁷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¹⁸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¹⁹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²⁰을 헐고
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²¹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²²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노트> 구약성서 열왕기하 14장 1-14절은 아마샤는 유다 왕이 되자, 부왕을 죽인 자들을 처벌하고 약해진 왕권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는 에돔을 처서 다시 유다에 복속시켰으며, 그 기세를 몰아 북왕국가지 침공하였다. 결국 아마샤는 북왕국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요아스가 죽은 후에야 유다로 돌아오게 되었다. 북왕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 당하였다. 대하 25:14절에 의하면, 아마샤가 에돔을 정복한 후 에돔 우상을 가져다가 유다에 보급시켰다고 한다.
요아스 이 년에¹: 남방 유다의 역사가 다시 기록되기 시작한다. 이는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왕위를 계승한 후 바로 뒤이어 유다의 아마샤가 통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마샤의 통치
간을 계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82쪽을 참조하라.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²: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대하 25:2). 아마샤의 두드러진 죄악은 그가 전투에서 에돔인들을 물리친 후에 에돔의 신들을 섬겼던 일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을 책망하는 선지자의 생명을 위협했던 일이다(대하 25:14~16).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³: 히스기야가 산당을 제거할 때까지 유다는 이곳에서 제사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굳게 서매⁴: 유다 왕 요아스가 살해된 후(12:20, 21) 불안정과 혼란의 시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시기에 새 왕은 틀림없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이 지나가고 온 나라에 왕의 권위가 섰을 때 마침내 그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들에 대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죽인 자의 자녀들⁵: 이 시점에서 이러한 언급을 한 것은 당시에 부모의 반역으로 인하여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모세의 율법책에⁶: 참조 신 24:16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염곡⁷: 이 계곡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지만 두 곳이 제시되어 왔다. (1) 사해 남단에 위치한 한 지역. (2) 브엘세바 동쪽에 위치한 와디 엘-밀흐(Wadi el-Milh., 소금).
에돔 사람 일만을 죽이고. 대하 25:5~13에서 길게 다루고 있는, 아마샤가 에돔과 벌였던 전쟁이 이곳에는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역대기 기록에 따르면 아마샤는 1만을 죽이고 또 1만을 포로로 데려와서 바위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게 했다.
셀라⁸: 문자적으로 “바위.” 이곳은 아마도 사해 남쪽 약 8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유명한 페트라(Petra) 지역이었을 것이다. “페트라”는 바위를 일컫는 헬라어 이름이다. 당시 에돔의 수도가 바로 이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자를 보내어⁹: 역대기의 기록은 임박한 전쟁의 원인을 강조하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 아마샤는 그의 많은 군사들 이외에 “은 일백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큰 용사 십만을 삯내었”다(대하 25:6).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온 군사들과 동행한다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의 기별을 선지자에게 받고 왕은 군사들을 되돌려 보냈다. 이러한 취급에 분노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유다의 몇 성읍을 쳐서 약탈한다(대하 25:7~10).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왕은 이스라엘로 돌아가던 군사들이 유다의 성읍들을 짓밟았다는 사실에 노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한다.
서로 대면하자¹⁰: 전쟁을 일으키려는 도전. 이곳에 사용된 용어를 볼 때, 개인적인 전투를 신청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가시나무¹¹ 유다 왕을 경멸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별을 이스라엘 왕이 보냈다. 아마샤가 에돔을 대항하여 성공을 거두었다면 요아스는 더욱 강한 아람 왕국을 대항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싸울 가치도 없는 적에게 도전을 받는다는 자체가 하나의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우월한 입장을 드러내는 답신을 해온 것이다. 백향목은 크고 강하며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위엄 있는 나무였다. 가시나무는 약하고 쓸모 없으며 발에 밟힐 덤불에 불과하였다.
네 딸을 내 아들들에게 주어¹²: 여호사밧은 아합과 동맹 관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결혼하는 것으로 확고해졌다(왕상 22:44; 왕하 8:18, 26; 대하 18:1). 왕족들은 각각의 자녀들에게 같은 이름을 부여하므로 그들의 우호관계를 나타내었는데, 유다의 여호람과 아하시야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그 실례다. 아마샤가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려는 이스라엘의 왕은 요아스로, 아마샤의 부친과 이름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두 나라 간에 지속되는 우호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아마샤는 요아스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킴으로 공식적인 동맹 관계를 인준하는 일에 관해 요아스에게 제안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아스는 지금 이런 제안에 대해 아마샤를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교만하였으니¹³: 지금 요아스는 아마샤가 현실을 주목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아마샤가 에돔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이 그의 귀에 들어갔다. 이스라엘 군대의 도움 없이 에돔과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아마샤는 요아스를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¹⁴: 인간에게 생기는 문제들은 대부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실 현재 유다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요아스는 아마샤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자신과 국가에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지 말도록 경고함으로 훌륭하게 처신했다.
듣지 아니하므로¹⁵: 아마샤는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행위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자신이 전쟁을 벌이려는 상대가 제시하는 순수한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벧세메스¹⁶: 예루살렘 서쪽 2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성읍. 요아스는 아마샤가 공격을 감행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남쪽으로 군대를 보내어 소렉 골짜기를 지나는 고대의 대로를 통해 서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접근하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이곳에는 자파(Ja. . a)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철도가 놓여 있다. 벧세메스 지역은 현재 텔 에르-루메일레(Tell er-Rumeileh)라고 불리며,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 탐사대에 의해 발굴되었다.
패하여¹⁷: 결과는 요아스가 예고한 그대로였다. 아마샤는 자기 자신의 상처를 쓸데없이 건드렸으며, 유다는 그 왕의 우매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아마샤를 사로잡고¹⁸: 고대에 전쟁은 엄청난 기세로 치러졌으며, 왕과 장군들은 군대를 이끌고 전열의 선두에 나서서 싸웠다. 이스라엘의 아합과 유다의 요시야도 전쟁에서 생명을 잃었으며(왕상 22:34~37; 왕하 23:29) 여호사밧도 심각하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였다(왕상 22:32, 33).
에브라임 문¹⁹: 이 문은 성의 서쪽 끝의 북쪽 성벽 즉 북쪽 끝에 있는 서쪽 성벽의 일부일 것이다. 이 부분을 파괴한 이유는 유다의 수도를 손아귀에 넣기 위함이었다. 성벽의 이 부분을 잃은 것은 유다 민족에게 커다란 수치가 되었다.
사백 규빗²⁰: 약 183미터.
금은²¹: 이 일은 예루살렘을 침공한 아람 왕이 예루살렘을 떠나도록 하기 위해 요아스가 하사엘에게 성전의 보물을 보내고(12:18) 바로 몇 년 후에 일어났다. 그때 이후로 다시 쌓인 보물들 역시 원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볼모²²: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는 것은 고대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볼모는 일반적으로 국가의 우수한 인재들 가운데서 선발했다. 승리한 국가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패배한 나라 백성들이 장래에 순순히 행동할 것을 희망하였다. 요아스를 향한 아마샤의 무모한 도전으로 아마샤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유다 국가 전체가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
202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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