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끝까지 견디는 욥의 인내심
장지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¹ 악창²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³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⁴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⁵
하나님을 욕하고⁶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⁷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⁸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⁹
<노트> 구약성서 욥기 2장 7-10절은, 욥은 사단에 의해 두 번째 고난을 맞는다. 이 고난은 혹독한 시련이다. 욥은 악한 피부병으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 질병이 죽음보다 더하였다고 실토한다(욥 7:4-6, 19:20, 30:17). 욥의 아내는 마치 사단을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그를 충동하였으나 욥은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이 두 번째 고난에서도 욥은 깊은 신앙을 나타내었다. 그는 선이든 악이든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형태의 사건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¹: 온몸 전체를 나타내는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표현이다.
악창²: 전통적인 해석법에 따르면 이 병은 나병(레 13장) 또는 상피병(象皮病,elephantiasis)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병 환자들은 대부분 격리조처를 당했지만 본서 전체를 살펴볼 때 욥이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는 말이 없으므로 나병은 아닌 듯하다. 추측컨대 이는 부스럼(Bagdad boil)또는 온몸 전체에 진물과 고름이나는 궤양성 피부병인 듯하다. 이 병에 대한 증상은 본서에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난다(본장 주제 강해 ‘악창’ 참조). 그러나 이러한 증상은 동시에 욥의 정신적 고뇌에 대한 시문학적 표현일 수도 있으므로(예를 들면 ‘불면’)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7:14, 19:17, 20, 30:17 등).
재³: 이것은 (1) 마을의 쓰레기 더미(the village ruvbbish heap, The NewLayman s Bible Commebtary), (2) 성읍 밖의 쓰레기 더미(the rubbish-dump outsidethe city), (3) 똥 더미(코프리아스, LXX), (4) 재(KJV, NIV, RSV,ashes)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런데 ‘재’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는 ‘에페르’와 ‘데쉰’등 2종이 있는데 전자는 대부분 회개 내지는 애통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삼하 13:19, 에 4:1, 3, 시 102:9등). 그리고 후자는 희생 재물등 어떤 대상이 타고 남은 후에 생기는 문자적인 재를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레 1:16, 6:11, 왕상 13:3, 렘 31:40).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페르)을 문자적인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추측컨대 이것은 성읍 밖, 또는 주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쓰레기 더미였던 것같다. 한편, 욥이 이러한 곳에 앉은 이유는 두가지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기 때문일 수있다. 첫째,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나병과 마찬가지로 피부병은 고대 사회에서 부정한 병으로 취급받았으며, 더욱이 이것은 이스라엘 공중 위생 규례상 불결한 병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욥이 성읍 밖으로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욥이 그의 아내와 대화한 것(9절),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대화한 것(2:1103장 등) 등의 사실 때문에 정설(定說)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만약 욥의 병이 부정한 것으로 판명되어 성읍 밖에 버리워졌다면 아내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그와 함께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고대의 문헌과 이스라엘 정결 규례(레 13, 14장)는 부정한 병에 걸린 자와의 접촉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둘째, 병에 걸려 만신 창이가 된 자신의 현상태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표시로 쓰레기 더미에 앉았을 수 있다. 즉 그는 이미 재앙을 받아 쓰레기 같은 육체를 가졌으며 사회로부터도 냉대와 거절을 받는 신세가 되었는 바, 이제 쓰레기 더미 위에 앉음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사황을 쓰레기 더미와 일체화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비참한 현상황에 대한 애통함을 암묵적으로 나타내려 했을 것이다.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⁴: 이와 흡사한 행위가 우가릿 설화(theUgaritic legend)에 나타난다. 즉, 바알(Baal) 신이 죽자 엘(El) 신이 막대기와 돌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어(베어) 애통을 표시했다. 이것에 근거하여 어떤 학자는 욥이 자기의 자녀와 종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표시로서 기와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었다고 주장한다(M.H. Pope). 그러나 이것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만약 욥이 그 자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했다면 자녀의 죽음 직후(1:19)에 그렇게 했어야했다. 또한 여호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욥이 당시 이방인의 주술적 행위의 성격이 짙었던 이러한 행위를 했을리도 없기 때문이다(신 14:1). 따라서 욥은 자기 몸에 난 종기와 부스럼, 그리고 가려움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 요컨대 ‘기와 조각’은 욥의 피부병의 증상을 일시나마 진정시키는 반대 자극제(counterirritant)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기와 조각’은 깨진 도자기의 파편을 가리킨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⁵: 여기에 나오는 욥의 아내의 권고는 일견(一見) 타당한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소유와 혈육을 상실하였고, 사랑하는 남편마저도 심한 악창에 걸려 생사(生死)의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깊은 절망과 좌절의 벽에 부딪혀 이와 같은 탄식조의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현세적 축복과 연관시켜 생각했으며,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불의한 분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지금껏 신앙을 고수해 왔으나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결과 당신은 도리어 현재와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지 않는가?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바로 지금이라도 배반하라’는 뜻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녀의 신앙은 종교를 통해서 유익(복)을 얻고자 하는 저급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녀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써 신성 모독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믿음을 상실하는 단계로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그녀의 말은 사탄의 책략에 결정적으로 동조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탄의 궁극적 목적은 욥으로 하여금 신앙을 상실케 하여 하나님을 욕하게 하는 것(5절, 1:11)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녀는 욥에 대한 단순한 비방자(slanderer)의 차원을 넘어 ‘악마의 보조자’(diaboliadjutrix, Augustine), 또는 ‘사탄의 도구’(organum satanae, Calvin)였던 셈이다. 이러한 행위는 생명과 환난의 위협에 직면해서까지도 놀라운 신앙의 용기를 보여주었던 라합(수 2:1-7), 에스더(에 4:16-18)의 행적과 뚜렷이 대조된다. 이렇듯 이제 욥은 육체적 질고 이외에 생의 동반자로부터 버림받는 이중적 고통에 처하게 되었다.
욕하고⁶: [히, 바라크] 욥 1:5에서는 욥이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걱정한다. 그리고 욥 1:11에서는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라고 번역되었다. 그런데 ‘욕’ 또는 ‘저주’라고 번역된 이 말들은 모두 ‘복’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바라크’라는 어근을 가진 이 말은 성경 전체에서 ‘복’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창 1:22에서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복 주셨다고 하신 말씀에서도 동일한 어근이 사용되었다. 또 그 어근은 시 66:8에서도 “송축하며”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을 뜻하는 말이 어떤 구절에서는 ‘욕’이라고 번역되었는가? 만약 욥기에서 이 말들이 ‘복’이라고 번역되었다면 앞뒤가 맞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욥기의 저자는 ‘욕’을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학자들은 그것을 완곡어법(euphemsism)이라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을 욕한다는 개념이 저자의 종교적인 감수성에 부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동일한 현상이 왕상 21:10, 13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욥기의 저자인 모세는 ‘욕’ 또는 ‘저주’가 명백한 상황에서 그 말 대신 ‘복’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대의 말이 … 말 같도다⁷: 본문에서 욥이 단순히 그 아내의 무분별함이나 지적 우매성을 질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네발라’는 주로 도덕적 종교적 요구들을 무시하는 불경스러움, 또는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무분별함을 뜻하기 때문이다(삼하 13:12, 사 32:6 등). 따라서 욥은 아내의 말이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 죄가 될 뿐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신성 모독적 언사임을 지적하고 있다(시 53:1).
우리가 … 받지 아니하겠느뇨⁸: 본서의 핵심 주제이자 욥의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1:21)라는 말 속에 이미 명백히 표현되었었다. 만물의 조성자이며 생사 화복의 주관자이신 자는 오직 하나님이다. 그분은 당신의 깊으신 뜻(섭리)에 따라 복을 주시기도 하시며 그것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신다(1: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의인에게 재앙을 주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에 대해 하등 항변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축복과 재앙의 수여와 철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토기장이의 비유’(사 29:16, 렘 18:4). ‘목자와 양의 비유’(암 3:12) 등을 통하여 성경 전반에 나타난다. 욥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본 절에서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미 받은 재앙에 대한 체념이 아니요,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로운 섭리를 대망하는 적극적 신앙의 발로였다. 요컨대 욥은 자신이 당하는 재앙이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적 유익을 위해 시련과 연단을 주신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5:17, 신 8:5, 삼하 7:14, 시 94:12, 잠 3:11, 12, 고전 11:32, 히12:5-11 등).
이 모든 일에 … 아니하니라⁹: 이로써 사탄의 2단계 시험도 무위로 돌아가고 욥의 신앙의 진정성(眞正性)이 재확인되었다. 그러네 혹자는 본문에 나타난 ‘입술’이라는 용어를 예로 들어 욥이 말로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이미 범죄하였다고 주장한다(Talmud, Baba Bathra, 17b).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부정된다. (1) 사람의 생각은 말로나 행동으로 표현되기 일반이다. 더욱이 생명의 위협에 처하는 극한 상황에 처하면 마음의 심층적 생각까지도 은연중 말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계 상황에 직면한 욥이 말로써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반증이 된다. (2)욥은 마음으로 범죄하는 것 못지않게 두려워하였다. 이는 욥이 그의 자녀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두려워하여 성결례를 행했다는 데(1:5)에서 명백히 입증된다. 이렇게 볼 때 욥은 외적 범죄 행위와 동일하게 내적 범죄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임을 인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욥이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저주했더라면 사탄의 계획은 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며두 차례나 욥을 의인으로 인정한 하나님의 칭찬(3절, 1:8) 역시 무위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편 욥은 친구들과의 변론 과정에서 자기 의(self-righteosness, 27:6)를 내세우는 등의 우를 범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견지함으로써 신약 기자에 의해 인내하는 자의 전형으로 기술 되었다(약 5:11).
2026.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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