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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 위인전> 오므리의 통치/장지원

노파 2025. 8. 6. 00:02

 

<성경 속에 위인전> 오므리의 통치

장지원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로 나뉘어¹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라 그를 왕으로 삼으려 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따랐더니

오므리를 따른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른 백성을 이긴지라

디브니가 죽으매²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일년에³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십이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며⁴

디르사에서 육 년⁵ 동안 다스리니라

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⁶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⁷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오므리가 행한 그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노트> 구약성서 열왕기상 16장 21-27절,은 오므리는 또 다른 반대 세력인 디브니를 치고 왕위를 차지한다. 여러번의 쿠테타로 북방 이스라엘은 불안정한 상태에서 오므리 왕조가 들어서게 됨으로 정치적 안정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암흑시대를 초래한다. 오므리는 왕이 된지 6년 후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긴다. 오므리 왕조는 4대에(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여호람) 걸쳐 44년간 북방 왕국을 통치하였다.

둘에 나뉘어¹: 시므리가 죽음으로 이스라엘에 두 왕이 일어났다. 두 왕은 각기 나라를 절반씩 다스리게 되었다. 시므리는 아사 왕 27년에 7일간의 짧은 통치를 시작하였고(참조 10, 15절) 디브니와 오므리도 그때 통치를 시작하였으므로 이들은 모두 아사 왕 27년에 통치를 시작한 셈이다.

디브니가 죽으매²: 디브니가 어떻게 다스리다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었다는 간단한 기록에는 좋지 못한 뜻이 내포돼 있다. 분명 두 왕 사이에는 계속 싸움이 있었고, 오므리가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고 나서야 비로소 싸움이 끝났을 것이다.

아사 제삽십일년에³: 분명히 오므리가 단독 통치를 시작한 때를 가리킬 것이다. 그가 처음 왕이 된 때는 아사 왕 27년이었다(15, 16절). 포함연대 계산법에 따라, 5년 후(아사 왕 31년) 그는 단독 통치를 시작했다.

십이 년을 위에 있으며⁴: 이 기간은 성경 연대기 학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 주었지만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된다. 여기서 12년은 오므리가 왕으로 다스린 기간 전체, 곧 그가 단독으로 통치한 기간뿐 아니라 디브니가 나라의 일부를 함께 다스리고 있던 때도 포함한다. 따라서 오므리의 통치기간은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삼은 때(15, 16절)인 아사 왕 27년에 시작하여 아들 아합이 뒤를 이어 왕이 된 해인 아사 왕 38년에 끝나므로(29절), 포함식 연대 계산법으로 12년이 된다(참조 68, 69쪽).

디르사에서 육 년⁵: 오므리가 다스리기 시작한 때로부터 디브니가 죽은 지 조금 후까지. 오므리의 경쟁자가 죽고 난 후 1년 동안 디르사는 계속 그의 수도였다.

사마리아산⁶: 오므리의 등극은 북방 왕국에 안정된 정부와 번영을 가져온 새로운 시대를 이루었다. 수도가 디르사에 있는 동안 나라는 알력과 불안정의 긴 시기를 지냈다. 아직도 불만의 씨가 디르사에 상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때문에 오므리는 새로운 수도를 정하기로 결심한다. 세겜 북서쪽 약 1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사마리아산을 택한다. 나라의 수도로 이보다 더 완벽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은 경관이 아름다운 위치에 있어서, 바다가 바라다 보이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주변 지역도 둘러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마리아산은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져 있어서, 장기간의 포위에도 잘 견뎌낸 사실이 보여 주는 것처럼(왕상 20:1; 왕하 6:24; 17:5; 18:9, 10) 군사적인 요새로도 적합했다. 주변 지역은 대단히 비옥하였고, 언덕 위에는 물이 풍족한 샘들이 있었다. 사마리아의 역사는 그 설립자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이었는지를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그 나라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스라엘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고대 사마리아 유적지를 발굴한 결과 도성의 가장 아래층은 오므리 시대의 것으로 연대가 매겨졌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⁷: 세속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오므리는 성공한 통치자였다. 그는 어지러운 나라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그의 이름은 유명한 모압 돌(Moabite Stone)에 실려 있는데, 거기에 오므리가 모압을 점령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참조 왕하 제3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이스라엘은 앗수르인들에게도 “오므리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고, 오므리가(家)를 궤멸시킨 예후까지도 “오므리의 아들”로 언급돼 있다(참조 제3권, 66). 그러나 여호와가 보기에 오므리는 전에 있던 모든 악한 왕들보다도 더욱 악하였다. 그는 이미 존재해 왔던 우상숭배를 수용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돈 사람들의 바알을 들여와 숭배하도록 장려하였다. 미가는 “오므리의 율례”를 “아합 집의 모든 행위”와 연관지어 철면피하고 희망 없는 배도의 상징이라고 말하였다(미 6:16).

 

202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