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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 위인전> 언약궤를 옮기는 다윗1-웃사의 충돌/장지원

노파 2025. 5. 12. 00:02

 

<성경 속에 위인전> 언약궤를 옮기는 다윗1-웃사의 충돌

장지원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¹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²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³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⁴으로 불리는 것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⁵ 싣고

산에⁶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⁷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⁸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⁹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¹⁰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¹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¹²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¹³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¹⁴

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¹⁵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¹⁶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¹⁷ 오벧에돔¹⁸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¹⁹

 

<노트> 구약 성서 사무엘하 6장 1-11절은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일을 제일 먼저 추진하는데 이 일을 실패하게 된다.

다윗이…모으고¹: 더 긴 서론이 부가된 동일한 기사인 대상 13:1, 6~14을 참조하라. 다윗은 예루살렘이 국가의 정치적 수도일 뿐 아니라 종교적 수도가 되도록 작정하였다. 여러 해 동안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있었는데, 이는 법궤를 엘리의 사망 후 블레셋에서 가져다가 그곳에 두었기 때문이다(삼상 7:1).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 전(殿)에 안치하기를 열망했다. 이 결의를 실행하기 전에 그는 국가의 지도자들을 모두 소집하여(대상 13:1~4) 자신의 계획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뺀 무리: 법궤를 옮기는 일은 인상적인 행진이자 국가적인 경사가 되어야 했다. 다윗은 왕국의 지도자 30,000명에게 이 엄숙한 축제에 참석하러 예루살렘에 모이라고 요청하였다.)

바알레유다²: 기럇여아림의 다른 이름(수 15:9; 대상 13:6)으로,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14.4킬로미터 부근에 있었다.

그룹들 사이에³: “사이에”라는 말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기 때문에, 그룹과 “거하시는”(개역한글판에는 “좌정하신”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이라는 단어의 관계가 해석상 관건이 된다. “거하시는”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자주 “앉다”로 번역되기도 한다(창 18:1; 19:1; 21:16 등).

여호와의 이름⁴: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그분의 거룩한 이름으로 불렸다. 하나님의 백성(신 28:10)과 그분의 성전(왕상 8:43) 역시 그분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문자적으로는 “야훼의 이름이 그것들 위에 불렸다”이며 이는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새 수레에⁵: 모세법은 법궤를 고핫 자손이 운반하도록 규정하였다(민 4:4~15; 7:9). 다윗은 이 지시에 유의해야 했지만, 법궤를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하면 특별한 존경의 표시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새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로 돌려보낸 것을 필시 기억했을 것이다(삼상 6:7~14). 그러나 그것은 경우가 전혀 달랐는데,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껏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궤가 이스라엘에 도착하자 모세에게 내린 하나님의 지시대로 레위인들이 그것을 수레에서 내렸다(삼상 6:15).

산에⁶: (제임스왕역(KJV)에는 “기브아에”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법궤는 기브아가 아니라 기럇여아림에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기브아”는 고유명사로 표기하기보다는 번역해야 한다. 기브아(Gib‘ah)는 “산”이라는 뜻이며 그렇게 65번 번역되었다(창 49:26; 출 17:9; 민 23:9 등). 그렇다면 아비나답의 집은 기럇여아림에 있는 산에 있었다.

아비나답의 아들⁷: 법궤는 엘리가 죽은 후 아비나답의 집에 적어도 2, 3대 동안 있었다(삼상 4:15~18; 6:1; 7:1). 웃사와 아효가 “아비나답의 아들”로 불린 것은 “아들”의 히브리어 용례대로 단순히 아비나답의 후손이라는 뜻이다(참조 삼상 14:50 주석; 제2권, 82, 83, 88, 89). 웃사와 아효는 법궤가 자기들 집에 있을 때 관리하고 보호하였으므로, 그것을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책임이 그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법궤를 레위 지파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야 한다는 여호와의 뚜렷한 지시(민 4:15; 7:9)에 벗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무시한 것에 대한 타당한 구실은 없었다.

그 새 수레를 모니라⁸: 그들이 수레를 몰긴 했지만 그 위에 타고 가지는 않았다. 아효는 수레 앞에서 걸어갔고(4절) 웃사는 법궤를 주시할 수 있는 옆이나 뒤에서 걸어갔을 것이다(참조 6절).

수금과⁹: 다양한 종류의 악기 목록은 다윗 시대에 음악 기술이 풍부했음을 나타낸다. 이때보다 적어도 1,000년 전인 애굽과 메소보다미아에서도 음악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증거가 있다.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¹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은 인상적일 뿐 아니라 즐거운 행사가 되어야 했다. 거기에는 기악은 물론 동행하는 군중의 노래도 있었다. 법궤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으므로 그들은 그분 앞에서 기뻐한 것이다(참조 대상 13:8).

나곤의 타작 마당¹¹: “기돈의 타작 마당”(대상 13:9)으로도 기록되었는데, 상이한 철자법이거나 사람 혹은 장소 이름이 둘 이상인 경우이다.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아마도 소들이 타작 마당에 이르자 흩어진 곡물을 얼른 먹으려고 돌아서다가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손을 들어¹²: 법궤는 거룩했다.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만지지 못했다(민 4:15; 부조와 선지자, 705).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요구사항에 관해서는 엄격한 분이시다. 물론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만지고도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일까지 책임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지시를 알았는데도 불순종했다.

진노하사¹³: 사람은 외양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심령을 살피신다. 웃사와 동행한 사람들은 웃사의 의도가 매우 훌륭하며 단지 법궤가 흔들리지 않도록 손을 뻗어 거들려고 했을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하였다. 법궤를 만진 그의 행동은 참람한 행동이었다. 죄 많은 존재는 감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만져서는 안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명시된 명령을 무시하는 극악함을 못 본 척 지나치지 않으셨다. 웃사의 죄를 처벌하지 않고 지나갔다면 다른 많은 사람까지도 그 범죄에 휘말릴 뻔하였다. 웃사가 저지른 것 같은 잘못이 징계받지 않으며 범죄자가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다고 결론짓도록 허용되었다면, 웃사의 결점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죄에 대해 매우 담대해졌을 것이다. 웃사의 죽음은 여호와께서는 모두에게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이심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 준 경고가 되었다.

저를…치시니¹⁴: 웃사의 죽음을 지나치게 혹독한 심판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민사 형벌로 종교적 위반 행위를 다루고, 현재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지만 범죄에 사형을 구형하던 신정체제(神政體制) 하에서 일어났다(출 22:20; 레 20:2, 9, 27; 민 15:32~36; 참조 행 5:1~11). 악을 막기 위해서는 엄격한 형벌이 필요하다. 만약 범죄에 대한 현재의 엄격한 법률이 느슨해지면 무법이 급증할 것이다.

웃사는 법궤와 함께 너무 오래 있어 익숙해진 나머지 불경의 정신이 그 안에 조성되었다. 그는 경솔하고 무분별한 참람죄를 지었기에 여호와께서도 그 죄에 맞게 그를 다루셨다. 이 놀라운 참사로 운집한 이스라엘 군중은 하나님의 명시된 명령의 중요성과 불경죄의 무서움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윗이 분하여¹⁵: 웃사의 죽음에 대해 다윗이 불편해한 것은 그 마음이 전적으로 바르지 못했던 사실에 크게 기인하였다. 그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있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여호와의 뜻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완전하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의 경험에 뭔가 잘못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윗이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잘못을 찾는 대신 마음에 숨겨진 악을 살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두려워하여¹⁶: 다윗은 자기 생애의 몇몇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까봐 두려워하였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706).

가드 사람¹⁷: (제임스왕역(KJV)에는 “깃 사람”(Gittite)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블레셋의 가드 사람이 아니라 단이나 므낫세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으로 고핫 자손에게 할당된 가드림몬(수 21:24~26)에 한때 거주했던 주민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벧에돔은 특별히 법궤를 운반할 임무를 부여받은 족속의 일원이었을 것이다(민 4:15; 7:9).

오벧에돔¹⁸: 이 이름이 대상 15:18, 21; 26:4, 8, 15에도 나오지만 신원은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는다.

오벧에돔…복을 주시니라¹⁹: 법궤가 거함으로 오벧에돔의 집에는 저주가 아닌 축복이 임하였다. 오벧에돔은 법궤가 모욕당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 불경을 얼마나 무섭게 벌하셨는지를 알았다. 그는 다윗과 수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궤의 존재를 두려워하며 무서워 떠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도 그는 법궤를 자기 집으로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 온 집: 오벧에돔에게 임한 축복은 그뿐 아니라 그의 온 집을 위한 것이었다. 신실한 아브라함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가족이 복 받을 것이었다(창 12:2, 3).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때 그를 통해 행복과 번영과 평화가 많은 사람에게 임한다. 복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된다.)

 

2025.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