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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욥의 고통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보는 엘리바스

노파 2026. 2. 25. 00:02

 

욥-욥의 고통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보는 엘리바스

장지원

 

 

¹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²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³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⁴ 때에 죽음에서, 전쟁⁵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⁶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⁷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⁸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⁹

¹⁰네가 네 장막¹¹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¹²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¹³을 네가 알 것이라

¹⁴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¹⁵가 이 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

 

<노트> 구약성서 욥기 5장 17-27정은, 엘리바스는 드디어 욥의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한다. 그는 욥이 고난에 합당한 가즐스런 죄악을 범하였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욥에게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연단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엘리바스의 말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가르치는 로마서 8장 28절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의 말에 있어서 한 가지 큰 문제점은 죄인의 고난과 의인의 축복에 대해서 너무 일방적인 견해를 가진 점이다. 욥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스테반, 바울의 고난도 그의 견해에 의하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보아야 한다.

¹본 절은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보는 엘리바스의 견해가 피력된 구절이다. 즉, 그는 욥의 고난을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연단(시험)’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단을 영구적인 것이 아닌 일시적인(temporary) 것으로 생각했다. 즉 질병(18절), 환난(19절), 기근과 전쟁(20절), 비방과 조롱(21절), 멸망과 기근(22절)모두가 하나님의 연단으로서 일시적인 것이니 욥이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인내하여야 한다는 권고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본문의 내용과 형식은 잠 3:11,12과 거의 일치한다(히 12:5, 6).

²본문은 욥의 질병(’피부병’,2:7,8)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즉, 욥의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의 일환이나 욥이 그것을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다는 것이다(신 32:39, 삼상 2:6). 한편 본문은 앞절과 뒷절이 동의(同意)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즉, ‘아프게 하시다가’- ‘상하게 하시다가’, ‘싸매시며’-’고치시나니’는 각각 동일한 의미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치료자로 그 백성을 병자(病者)로 묘사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사 30:26, 호 6:1), 예수께서 죄인을 ‘병든 자’, 당신을 ‘의원’으로 비유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막 2:17, 눅 4:23).

여섯 가지 … 일곱 가지³: 일종의 관용적 표현으로 여기서는 ‘모든’(all), ‘어떠한’(whatever)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처럼 숫자를 반복하여 그 뜻을 강조하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학(’우가릿 신화’)과 히브리 문학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로 꼽힌다(창 4:24, 잠 6:16, 30:15,18,29, 전 11:2, 암 1:3-13, 미 5:5, 집회서25:7, 마 18:22). 한편 본 절은 욥이 징계를 달게 받는다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을 것임을 나타낸다.

기근⁴: 수렵과 목축과 거의 의존하던 고대 족장 시대에서 기근은 가장 큰 두려움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성경은 족장 시대의 기근의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창41:29-36).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가혹한 형벌의 하나로 간주한다(레 26:19,20, 신 28:22-24, 왕하 8:1, 시 105:16, 사 14:30, 렘 24:10).

전쟁⁵: 이것 역시 고대 근동 지역에 있어서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대부분 유목민으로 이루어진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종종 무리를 지어 다른 부락을 약탈함으로 그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욥의 재산과 육축을 빼앗은 ‘스바인’(1:15)과 ‘갈대아인’(1:17)의 침입도 작은 전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고대인들이 겪었던 가장 곤혹스러운 위협에서부터 욥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엘리바스의 권고이다.

혀의 채찍⁶: ‘불의 혀’(tongue of fire,Gordis), ‘쏟아지는 저주’(공동번역), ‘채찍의 혀’(Hebrew Sermon on the O.T. p. 147) 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어떤 것을 취하든 간에 ‘중상’(LB, slander), ‘비방’을 의미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결국 이러한 표현은 채찍이 공중에서 휘도는 것처럼 사람의 입 안에서 날름거려 파괴적 위력을 동반하는 혀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라 하겠다(시 31:18, 렘 18:18). 이처럼 인체(人體)의 일부분을 사물로 형상화(形象化)하거나, 또는 사물의 일부분을 의인화하는 것을 히브리문학의 수사학적 기교이다(예를 들면 15절의 ‘입의 칼’, 20절의 ‘칼 권세’(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칼의 손’이 됨)).

들짐승⁷: (하야트 하아레츠).직역하면 땅의 짐승’(KJV,NIV,RSV,the beasts of the earth)이며 육축을 해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 맹수(LB,wildanimals)를 가리킨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어서 맹수를 매우 위험스런 존재였으며, 특히 성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민가(民家)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왕하 17:25). 한편, 20-23절에 나타나는 재앙(20절-기근, 전쟁’21절-중상, 22절-참화,들짐승)을 에스겔 14:21에 나타나는 재앙과 동일시 하려는 견해도 있다(Rawlinson).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⁸: 본 절은 ‘밭에 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진다. (1) ‘들판의 요정’(M.H. Poge), ‘들판의 주들’(K. Kohler), ‘들판의 아들들’(G.Beer) 등으로 볼 경우, 즉, 본 절은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않는 어둠의 영적 세력들로부터 음해(陰害)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대인들, 특히 팔레스타인인들은 땅 속에 영(地神)들이 거하며, 인간이 이들을 노하게 할 경우 흉년과 기타 재앙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2) ‘들판의 돌’로 볼 경우(KJV,RSV,NIV,the stones of thefield), 즉, 밭 농사가 잘되어 풍족한 수확을 거둘 것이라는 표현이다(Hartley,Habel). 다시 말하자면 대부분 돌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어서 돌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밭 곡식이 잘 성장하여 풍년을 맞는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지역에서는 돌 때문에 밭 곡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견해 중 후자를 따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⁹: 본 절은 앞절과 동의(同意) 대구를 이루고 있다. 특히 앞절의 ‘밭의 돌’이 인간의 생존에 적대적인 무생물(無生物)을 상징한다면 여기서의 ‘짐승’은 공히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생물(生物)을 총제적으로 상징한다. 그러므로 본 절은 인간(의인)이 맹수(생물)의 위협없이 평온하고 안온한 삶을 영위함을 의미한다. 엘리바스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에 육축과 인명에 대한 맹수의 위협이 흔했던 사례에 연유한 것 같다(22절). 한편 본문은 인간의 타락으로 와해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될 것임을 나타내는 바, 이는 메시아의 도래로 완성될 새로운 창조 질서(사 11:6-8, 호 2:18)를 시사해 준다.

¹⁰23절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장막’, ‘우리’ 등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대상이 분명히 지적된 점이 다를 뿐이다.

장막¹¹: 오늘날의 ‘텐트’(RSV,tent)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욥이 성읍(town)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목민(당시 유목민들은 대부분 성읍에서 떨어져 유랑하면서 육축을 했다)이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29장에서 보듯 욥은 성읍에서 유력한 현자(賢者)중의 하나였으며, 또한 농부요, 목축업자였다(1:3, 15, 17). 그러므로 ‘장막’은 오히려 ‘집’(LB, home)으로 옮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¹²본문 역시 23절과 마찬가지로 동의(同意)대구법이 사용되어 의인의 후예가 번성할 것을 강조해 준다.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¹³: 과장법과 직유법이 쓰인 문학적 표현이다. 시 72:16을 고려해 볼 때 이 ‘풀’은 성읍 밖에 도처에 널려 있는 야생화(野生花) 또는 잡초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라니’(창 22:17)라고 약속하셨던 것을 들 수 있다.

¹⁴본 절에 나타난 장수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상기시킨다(레 26:3-13, 신 28:1-14). 실제 고대 히브리인들은 ‘장수’를 ‘자손의 번성’(25절)과 더불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다(왕상 3:14, 시 91:6, 잠3:2, 9:11, 10:27, 사 65:22, 슥 8:4 등). 한편,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된 엘리바스의 변론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을 거쳐야만 6장부터 전개될 욥의 반론(反論)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고난의 일반화(一般化):거듭 확인하거니와 욥의 고난은 그의 특별한 죄악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탄의 궤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으로 주어진 것이었다(1:9-12, 2:4-6). 하나님은 1차적으로 사탄의 참소(1:9-11, 2:4,5)의 허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욥에게 시련을 내릴 것을 허용하셨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 의미에서 그것은 욥에게 신앙의 연단(演壇)과 보다 새로운 차원의 계시 신앙을 주기 위해서였다. 즉, 자기 의(self-righteousness)와 선행(善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만족감을 느낀 욥에게 초월자 앞에서 그것은 절대적 구원의 근거가 아닌 단지 상대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측면에서 욥의 고난은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기 보다는 의인의 신앙 건덕(建德)을 위한 일종의 ‘시련’이었다(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신 8:2,16, 잠 17:3, 약 1:12, 벧전 1:6, 4:19 등). 그러나 엘리바스는 이러한 욥의 고난의 특수성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일반적 고난의 범주에 넣어 해석했다. 그 결과 그는 욥이 범죄로 인해 고난받고 있음을 심증적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3,4).(2) 경험 철학: 엘리바스는 자신의 논증을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이 목도한 몇가지 사례를 들었다(4:8-11, 5:3). 그런데 이 같은 것들은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진리이나 현실의 개별적 부분에 있어서는 그대로 적용되기 힘든 측면을 내포하였다. 결국 그는 부분적 경험에 근거하여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그것을 모든 부분에 적용시키는 잘못을 범했다.(3) 위로자로서의 자격 결여: 그의 논증은 거의가 딱딱한 교리 체계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으며 실로 냉정하기조차 하다. 그는 ‘위로자’(comforter)라기 보다는 ‘훈계자’ 내지는 ‘교사’로는 욥 앞에 섰던 것이다. 물론 엘리바스의 고압적이고 냉정한 자세가 5:17-27에서 약간 완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27절에서 보듯 그는 자신을’지혜자’(wiser)요, 욥을 그 지혜에 복종해야 하는 ‘학생’ 정도로 취급함으로써 욥의 심경을 격발시켰다(6:24-29). 요컨대 엘리바스는 친구에 대한 참된 우정에서 자신의 변론을 시작했으나(4:1,2)욥의 특수한 상황을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투적인 논리만을 나열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욥을 정죄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연구한 바¹⁵: 이는 엘리바스의 지금까지의 언설(言說)이 자신의 경험 체계에 근거해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물론 그의 변론이 하나님의 계시(4:12-21)에 의존한 면도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 계시 역시 그의 경험의 일부였다. 특히 그는 4:8과 5:3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의 사고 체계가 경험에서 실증된 진실임을 강조하였다. 한편 기독교 신앙이 경험, 곧 역사적 산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경험을 초월한 세계를 믿음으로 신뢰하는 데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히 11:1).

 

2026.2.25